20세기 뉴욕의 음울한 자화상
<택시 드라이버>는 1976년에 개봉한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로, 한국에서는 1990년에 개봉한 이후 2008년과 2025년에 재개봉한 작품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인공인 '트래비스 비클(Travis Bickle)'을 맡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며,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완성도가 상당했다. 작품에 대한 면밀한 해체와 분석보다는 느꼈던 여러 감상들을 아래에 남긴다.
작품의 주인공인 트래비스는 뉴욕에 살고 있는 퇴역 군인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다 야간 택시 기사로 일하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도 포함된 '택시'는 작품 내에서 여러 방면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트래비스는 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리지만 정작 그의 직업은 수많은 인파를 뚫고 이름 모를 손님을 데려다줄 것을 요구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그의 상반된 처지와 심리는 트래비스의 감정의 낙차를 더 크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택시 기사는 작품의 주연보다는 배경에 가까운 역할이지만, 본 작품에서만큼은 택시 기사 트래비스가 작품의 주된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직업에 의한 배경지식이 뒤집히고, 이야기의 조연이었을 택시 기사가 작품의 주된 갈등을 이끌어내는 주연으로 변모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인상 깊었다. 작품의 서사 상 트래비스가 굳이 택시 기사가 아니었더라도 이야기는 흘러갔겠지만, 직업적 특성이 서사를 강조해 줄 수 있는 하나의 보조 수단으로 잘 활용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트래비스가 뉴욕의 뒷골목이나 할렘가 등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택시를 몰고 다닌 덕택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20세기 중후반 뉴욕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름답고 정돈된 도시뿐만 아니라 눅눅하고 습한 분위기의 도로, 매춘부가 돌아다니는 거리, 택시에 오물을 던지는 아이들의 모습 등 도시의 다각적 모습들을 택시 기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자연스럽고 다양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과거의 쿠바 모습을 봤을 때도 이런 흥미로움을 느꼈었다.)
트래비스는 택시를 타고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관망하는 일종의 관찰자였지만, 정작 자신의 심리와 내면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작품의 대부분이 그의 독백으로 진행되지만, 정작 그 내용에는 주관적 해석이나 단정이 많이 섞여있다. 이런 외형적 환경과 내면적 심리의 대비가 그의 처지와 심정을 재차 강조해 주기도 했다.
택시 내부는 기본적으로 좁은 물리적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운전기사인 트래비스의 공간은 승객이 타고 내리는 공간보다도 비좁다. 이와 같은 공간의 제약은 종종 그 안에 갇힌 사람의 심리를 옥죄기도 하지만, 작중 트래비스에게 있어 택시는 제한된 공간인 동시에 자신만의 안락한 세상이기도 했다. 안락한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가 '찰스 팰런타인(레오나르드 해리스)'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 사무실에서 일하는 '베시(시빌 셰퍼드)'에게 다가간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큰 결심이었을 테지만, 정작 그녀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간 후 그를 떠나는 베시는 길가에 있던 다른 택시를 잡아 극장을 떠난다. 이때 트래비스는 자신에게도 택시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에게서 떠나버린 베시를 망연히 바라본다. 택시 내부 공간은 트래비스가 '아이리스(조디 포스터)'를 처음 마주치게 되는 순간에도 활용된다. 포주이자 자신을 붙잡아두던 '스폿 매튜(하비 카이텔)'에게서 도망치고자 아이리스는 대뜸 길에 서있던 트래비스의 택시에 오른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매튜에게 붙잡혀 택시에서 내리게 되며, 매튜는 트래비스에게 꾸깃꾸깃한 지폐를 건네며 이 일을 잊어달라고 말한다. 이후에 그는 길에서 아이리스를 택시로 칠 뻔하는 사고를 내기도 한다. 이 장면들을 트래비스와 택시의 관계에 집중하여 생각해 보면, 두 사건 모두 아이리스가 안락한 트래비스의 공간으로 침입해 온 형국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결국 트래비스는 자신의 공간이자 세상 내부로 들어온 아이리스를 내버려 두지 못하고 총을 맞아가면서까지 매튜에게서 탈출시킨다. 이처럼 택시라는 공간적 특성은 트래비스의 심리이자 내면과도 연결되어 작품의 서사에 활용되었다.
작중 트래비스는 자신의 무지를 에둘러 숨기지 않는다. 베시의 환심을 사고자 팰런타인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되겠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정책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의 택시에 팰런타인이 우연히 탔을 때도 그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팰런타인이 정책에 대해 묻자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능동적이지만 무지한 인물처럼 보이며, 자신을 포장하려 애쓰지 않는다. 이성적 계산보다는 불충분한 자기 합리화를 바탕으로 돌진하는 그의 모습이 위 상황들과도 겹쳐진다.
트래비스의 행위는 우발적인 경우가 많지만, 작품의 큰 틀에서 본 그의 동기와 심리는 점진적으로 상승한다. 그가 우연히 태운 승객은 택시의 뒷자리에 탄 채로 한 집의 창문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내가 저기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곳은 자신들의 집이 아니며, 다른 남성의 집이라고 승객은 덧붙이며 이후 아내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런 그를 보며 트래비스는 침묵한다. 그리고 얼마 후, 총을 소지한 채 마트에 들른 트래비스는 총을 든 강도를 마주하게 되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를 쏜다. 그리고 그 이후, 트래비스는 팔렌타인을 암살하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며, 작품의 후반부에는 이윽고 매튜와 그의 일당들을 모두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른 후 아이리스를 구한다. 그는 순차적으로 타인의 분노를 마주하고, 정당방위로 타인을 쏘고, 이후 본인의 의지로 타인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며,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의지로 타인을 죽이고 만다. 마트, 팔렌타인, 매튜와 마주하는 각 장면들만 놓고 보자면 트래비스의 행동은 우발적이고 크게 망설임이 없다. 그렇기에 각 장면들을 따로 놓고 보면 그는 막무가내로 사람을 쏘는 살인마처럼 보일 수 있지만, 위와 같이 서사의 과정을 놓고 바라보면 그의 행동과 심리가 순차적으로 확장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베시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관계에 익숙하며, 같은 선거운동 사무실에 있는 동료 '톰(앨버트 브룩스)'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뜸 찾아온 트래비스의 데이트 신청에 응한 것 또한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존재라고 트래비스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녀도 팔렌타인에게는 존경심을 표하지만, 이는 우월한 인물에 대한 동경이라기보다는 그런 인물을 자신이 모시고 있는 데에서 오는 자기만족이 더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
트래비스가 아이리스를 구출하는 장면이 그의 망상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관객이 선택하기 나름인 열린 결말과 유사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망상인 경우와 망상이 아닌 경우 모두 다른 느낌으로 비극적이고 음울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각 상황을 떠올려보고 해석하는 재미 요소가 주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진실과 거짓, 현실과 망상이 뒤섞인 작품들을 개인적으로 선호하기에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인셉션>, <셔터 아일랜드>,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같은 작품들이 떠오른다.)
곱씹어볼수록 잔향이 강한 작품이었다. 특유의 뿌옇고 눅눅한 전경, 그리고 이에 잘 어우러지는 OST도 기억에 남는다. 2025년에 와서 보자면 참 다양한 영화의 레퍼런스이자 오마주가 되었겠다는 생각도 한 편으로 들었다. 그만큼 탄탄한 작품이었고, 앞으로도 종종 다시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