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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Jun 19. 2022

[감상문]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훌륭한 연기력과 이를 뒷받침해준 효과적인 연출

2022년 6월 18일에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았습니다.

레베카를 봤던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이번에는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을 보고 왔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갈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원작인 책도 읽지 않았고 작품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관람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다. 직관적이고 분명한 묘사와 표현, 착장이 도움을 주었다.


작품이 전반적으로 지킬(과 하이드)의 시점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편향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한 발 물러나 지킬을 평가해보면, 그는 본인 연구의 성공을 위해 정신병동의 환자를 통한 임상시험을 요청했으며 (그 목적이 정당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약혼자인 엠마가 있음에도 루시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리고 연구의 완성을 위해 결국엔 본인을 시험대상으로 하여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된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이상적인 인물도 아니며, 영웅적 인물도 아니다. 하이드도 결국은 지킬에게서 파생된 인격이기에 지킬도 하이드가 저지른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시작 자체도 그의 연구와 약물에 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덧. 영화 '아이덴티티'와의 비교
다중인격이 저지른 범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지킬 앤 하이드와 영화 아이덴티티의 유사점이 있다. 영화에서는 범인의 여러 다중인격 중 한 인격이 살인을 저질러 재판을 받게 된다. 범인과 그 인격은 다른 인물로 봐야 하며, 치료를 통해 살인마의 다중인격이 제거되었음을 소명하여 범인은 결국 처벌을 면한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다른 인격을 살인마로 착각한 것이었고, 남아있던 진짜 살인마의 인격이 깨어나며 호송차량의 간수를 살해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중인격이 생겨난 이유를 제외하면, 내면의 다른 인격이 범죄를 저지르며 끝끝내 이겨내지 못했다는 점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스토리 전개 상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고 극적으로 활용되지도 않는다. 지킬과 하이드의 두 인격에 대응하게 두 여자 주인공이 배치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느낌이다. 루시는 그나마 스토리에 녹아있지만, 엠마는 사실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전체 스토리에 큰 영향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연극/뮤지컬(공연예술)과 영화(영상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일지, 공연예술이 제시할 수 있는 강점은 무엇일지 고민하며 뮤지컬을 관람했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시각, 청각에 의한 직접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연극 자체도 직접 경험의 제공이라기보다는 배우의 연기에 의한 간접 경험의 체험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활용되는 시각과 청각 정보는 현실세계의 직접적인 그것이다. 영상은 아무리 생동감 있다고 하더라도 화면이라는 매개체를 거쳐야만 한다. 스크린, TV, 스마트폰 화면 등 결국엔 간접적 매체를 통한 경험이라는 말이다. 그에 반해 공연예술은 실제 배우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별도의 중간자 없이 경험할 수 있다. (청각의 경우 스피커가, 시각의 경우 오페라글라스가 있지만 이는 증폭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지킬 앤 하이드를 보면서 이런 직접 경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부르는 장면에서였다. 노래와 감정선이 고조되다 보면 어느새 무대 뒤가 열리고 새하얀 빛이 배우의 등 뒤에서 관객석을 향해 뻗어 나온다. 단순히 밝아지는 효과가 아닌, 직진성을 가지고 뻗어 나오는 광원이었다. 빛이 직접 관객에게 전해지는 이런 경험이 영상예술과의 차이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면과 연출 자체는 영상예술에서도 충분히 구현해낼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영상은 중간 매개체를 통해 전달된다. 빛과 더 밝은 빛, 인물 등 모든 것이 화면이라는 간접조명을 통해 투영되는 구조에서는 공연예술의 조명 같은 직접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위의 사례는 아니나, 작품 초반에 조명이 잘 활용된 장면도 인상 깊었다. 무대 바닥을 비추는 직사각형의 조명이 무대 중앙에 있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가 누워있는 침상을 향해 점점 좁아진다. 공간은 동일하나 축소되는 조명을 통해 공간이 축소되는 느낌을 전달해주는 장면이 좋았다.


지킬과 엠마의 결혼식 장면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일순간 멈춰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도 공연예술이 제시할 수 있는 연출의 좋은 사례인 것 같다. 실제로 주변의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니고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인데, 방식 자체가 새롭다기보다는 연극에서의 표현 방식이 흥미로웠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과 실제 배우가 멈춰서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다르나 결과적으로 관객의 시선에서는 동일하다. 영상예술에서는 편집을 통해 실제 시간을 멈출 수 있지만, 공연예술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제약을 굉장히 간단하게 풀어낸 것 같다.


작품 중반에 지킬과 하이드의 입장이 실시간으로 바뀌며 갈등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서 배우분의 연기력에도 감탄했지만, 연출도 훌륭했다. 동일한 배우가 지킬과 하이드를 연기하기 때문에, 작품은 관객에게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킬의 인격일 때는 머리를 뒤로 넘겨 정갈하게 묶으며, 하이드의 인격일 때는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치고 털코트를 입기도 한다. 다른 장면에서는 이렇게 급작스러운 변화가 없지만, 이 장면에서는 대사 한 두줄 단위로 지킬과 하이드의 인격이 바뀐다. 이때, 배우가 서있는 방향과 자세, 헤어스타일, 조명의 색깔로 이 두 상태를 구분하여 표현한다. 템포가 굉장히 빠른데도 자세를 고쳐 잡고 헤어스타일까지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풀어헤쳤다가 하는 배우분의 연기가 감탄스러웠다. 그 중간에 두 인격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는 정면을 보고 얘기하면서 중간 상태도 표현해준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보니, 공연예술의 근본적인 조건까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극이나 뮤지컬의 기본 대전제는 작품과 관객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 합의인 것 같다. 무대와 현실 세상을 비교하면 당연히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실제 건물, 바닷가, 거리 등 장소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것은 불가하다. 여기에서 관객이 불충분한 공간과 장소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면 공연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제약 조건에 대한 인정과 상호 간의 약속 및 합의가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공연예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뮤지컬 자체도 재밌었지만,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그 또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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