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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May 21. 2022

벼는 가을의 풍년을 좋아하고 반길까?

벼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관(史官)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들

24절기 중 하나인 우수(雨水)는 봄기운이 들고 초목(草木)이 싹트는 때라고 한다. 얼어있던 땅이 녹으며 새싹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 애써 고민하지 않더라도 봄이 왔음을 깨닫게 된다.


생동(生動)하는 것은 초록색/푸른색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청춘(靑春)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봐도 이는 우리에게 이미 학습이 완료된 이미지이다.


산책을 할 요량으로 저수지에 갔었다. 저수지 둘레의 산책로에 서서 보니 갈대가 무리를 이룬 것이 보였다. 이제 막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단계였기도 하지만, 그날따라 우중충한 날씨에 힘입어 굉장히 황망하고 인생의 말년 느낌이 났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니 수확이 끝난 겨울의 밭이 보였다. 빈 땅에 벼가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갈대와 벼를 한 번에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겨울 철의 갈대와 수확 무렵의 벼를 보면 색은 비슷한데 왜 한쪽은 쓸쓸함과 고독함이, 다른 한쪽은 풍요와 번영의 황금빛이 떠오르는 것일까?


처음 든 생각은 효용성에 의한 우리의 인식 차이이다. 벼는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을 제공해주는 수단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먹거리가 있지만, 농경사회가 시작된 과거로 점차 거슬러 올라갈수록 작물의 중요도는 점차 상승할 것이 자명하다. 그에 비해 갈대가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 수준은 비교적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이런 효용성의 차이, 각 대상의 본질에 의해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포장되고 미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갈대와 벼의 외형이 왜 비슷한 느낌을 주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 생각을 하다 보니 좀 더 근원적인 이유에 도달하게 된다.


밭이 소위 말하는 황금빛으로 물드는 때는 가을의 수확철이다. 벼를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본 수확철은 풍요의 계절이지만, 벼의 입장에서 보면 가을은 생애주기 중 가장 끝단으로, 후대를 위한 씨앗을 뿌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로 볼 수 있다.


우리가 풍요라고 부르는 그 계절은 벼의 입장에서 보면 생의 노년이요 죽음의 계절인 것이다.


물론 벼의 죽음이 그들에게 있어 무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벼의 죽음은 단독의 개체 입장에서 보면 끝이지만, 전체 종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생명의 밑거름이자 종의 이어짐이다.


사람의 입장, 벼(단독 개체)의 입장, 벼(전체 종)의 입장 등 같은 상황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주관과 해석인 것 같다. 사관(史官)이 누구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따라 같은 죽음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비통함이, 생을 이어나갈 양분이, 대를 이어나가는 순환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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