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쓰기를 놓지 않은 이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있었지만 내가 넘볼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읽었던 많은 글들은 세상의 진리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고, 그것을 너무나 감동적이고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소재를 엮어 광활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소설부터, 수려한 언변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자기 개발서까지. 다양한 글들이 주는 감동과 글쓰기에 대한 나의 자신감은 반비례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글을 읽고 오랫동안 연습을 한다 해도, 그런 멋진 작가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절대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도 당연하게, ‘내 글’을 쓰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꿈이 작가도 아니었거니와, 작가가 아닌 사람 중 글을 쓰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는 스스로를 그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글을 매끄럽게 쓰는 대학생’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다. 대학생이 ‘상담사’로 진화(?)되었을 뿐. 그런 내가, ‘나도 조금은 특별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 경험이 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수업이 빡빡하지 않고 강의 내용이 재밌어서 인기가 많았던 ‘과학사’라는 교양 수업이 있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수강신청에 성공하여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었다. 대략 7~80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생이 많아서 개개인에 대한 주목도가 덜했고, 발표 과제도 없어서 매주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딱 하나, 이 수업에서 영 번거로운 부분이 있었다면 주기적으로 주어지는 ‘감상문’ 과제였다.
교수님께서 지정해주신 과학기술과 관련된 미디어물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과제였다. 듣기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양식도 견본도 없어서 뭘 어떻게 써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아… 선배들한테 꿀이라는 얘기만 들었지 감상문 과제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진리가 대학 강의에도 적용되는지 미처 몰랐다. 그래도 발표 없는 게 어디야, 하면서 열심히 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첫 과제는 영화 ‘신기전’을 보고 감상문을 적어내는 과제였다. 영화를 그렇게 심도 있게 보지도 못하는 편이고 영화 속에 들어 있는 과학의 원리 같은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서 무지하게 툴툴 댔던 기억이 있다. 영화는 재밌게 보았지만 과학과 관련된 부분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 건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애초에 과학 얘기는 집어치우고 신기전에서 어떤 부분이 재밌었는지를 열심히 읊었다. ‘과학사’라는 수업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내용을 문장력으로 커버해보고자 나름 심혈을 기울여 작성했다. 그리고는 교수님이 대충 읽으시길 바라며 과제를 제출했다.
첫 과제를 제출하고 난 바로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내 바람과는 달리 교수님은 과제를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읽어 보셨고 심지어 흥미로웠던 감상문 과제들을 수업시간에 한 꼭지씩 읽어주셨다. 교수님이 읽어주시는 글 중, 굉장히 낯익은 문장들이 들리기도 했다. 내 감상문이었다. 모르는 것을 괜히 아는 척하지 않고, 내가 느낀 점만을 소신껏 적어 낸 것이 교수님 보시기엔 흥미로웠나 보다.
과제는 점점 어려워져서, 영화뿐만 아니라 책, 다큐멘터리 등의 감상문 과제도 추가되었다. 하지만 나는 끄떡없었다. 과학과 관련된 어려운 내용은 제쳐둔 지 오래고, 내 생각들을 적어 내리는 재미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내 과제에 적힌 문장들을 읽어주실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저거 제 감상문이에요!’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에 꾹 참느라 나름 애를 쓰기도.
그렇게 한 학기가 마무리되고, 과제에 대한 열정에 비해 시험공부는 너무나 소홀히 해서 B라는 성적을 받았다. 성적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목별 세부 점수를 알고 싶어서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혹시나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것은 절대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 정말 공손하게 메일을 썼던 기억이 있다.
다음 날, 교수님께 바로 답장이 왔다. 이제 공지를 올렸으니 게시판을 참고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답장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밑에 교수님은 2줄 정도 첨언하셨다.
“김주리 양의 과제 감상문을 읽어보는 것은 나에게 학기 내내 큰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본인의 글쓰기 소질에 자신감을 갖고 더욱 연마하면 아주 훌륭한 주리 양만의 장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많은 칭찬을 받는다. 나 또한 못 할 때는 질책을, 잘할 때는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평범하게 성장해 왔다. 스스로를 특출 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면서도 그것이 못내 씁쓸했었나 보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고,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리 빛나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 나에게 교수님의 칭찬은 ‘너는 특출 나. 재능 있어. 빛이 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설령 교수님의 의도가 글쓰기를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학생을 격려해주기 위한 인사말이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열 번 평범하고 한 번 특출 난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릴 거다.
저 메일을 받은 이후로, 내 마음속에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표 하나가 추가되었다. 바로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칭찬 한 번 받았다고 비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가의 길로 뛰어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물론 누군가가 이런 결정을 한다 해도 무모하다는 비판보다는 용기 있다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 아주 작은 기회나 틈이 생겼을 때, 나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내적인 소재가 충만해졌을 때, 나는 반드시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작가로 선정된 것, 내가 살면서 느낀 것들이 마음 안에서 글로 엮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돈이 된 것이 그 사소한 기회와 틈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처럼 끝끝내 글쓰기를 놓지 않게 한 이유들이 하나씩 존재할 것이다. 그건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일 수도, 글쓰기가 주는 쾌감과 성취감일 수도, 나의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 어떤 이유든, 일련의 이유를 가지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글쓰기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아닐까. 나를 비롯한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적어 내려가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느껴질 지라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특별함을 지나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개성을 가진 글쓰기 세상에서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