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 그래 나야 나, 선이... 수학여행 때 사진 보다가 생각났어 네가... 히히힉, 빨간 잠바에 노란 핀, 사진 보면서 한참 웃었어 옷도 특이하고 폼도 꼭 아저씨 같고"
고등학교 수학여행,
4월인데 설악산엔 눈이 내렸었다. 빨간 점퍼를 입고 둥근 노란색 핀을 꽂았던 , 티고 싶어 안 달란 사람처럼 당시 난 어울리지 않게 원색을 좋아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선이의 갑작스러운 전화였다.
선이는 참 지독한 친구였다.
도심에서 한 참 벗어나 변두리에 위치했던 우리 학교는 기숙사가 없었다. 대신 학교 주변에 학생 자취를 목적으로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선이와 나는 그 자취촌의 구성원이었다. 비록 집은 달랐지만 연탄불이 꺼지면 밑불을 기꺼이 주고 , 김치가 떨어지면 나눠먹던 학교친구이자 동네 이웃이었다. 웃음 많고 다정했던 선이는 공부하느라 잠이 부족해 책상에 엎드려서도 깊은 잠을 자곤 했다. 난 그런 선이를 대단하고 지독하다고 생각했었다.
" 야! 근데 웬일이야?
" 말했잖아, 사진첩 보다가 네가 생각났다고, 뭐 하냐? 취직은 했고?"
" 백수 된 지 한 달 됐어, 애들 가르쳤거든, 학원생이 자꾸 주니까 잘렸지 뭐."
때는 6.25 전쟁 다음의 국난이라 불리는 1997년 IMF... 바로 직전 겨울이었다.
" 오! 그래, 그럼 아르바이트할래, 여기 서울인데, 강남 양재역 근처"
일단 반가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만의 연락이었으니까, 물론 일해 본 적이 없는 서울! 강남!이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 다른 건 준비할 거 없고, 희수야! 김치 한통만 가져올래, 김치가 떨어져서"
'김치' 이것 역시 옛 추억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래 갈게, 선이야! 우리 보자"
그렇게 김치통을 들고 오랜만에 서울구경도 할 겸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선이의 방은 강남이 아닌 성남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그곳엔 선이 말고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이 10명쯤 더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예상치 못한 생경한 상황이 연이어 펼쳐졌다. 저녁식사 때가 되자 각양각색의 밥그릇이 등장했다. 플라스틱 밥그릇에서부터 스테인리스 밥그릇, 양은 밥그릇까지, 흡사 개밥그릇을 연상케 했다. 반찬 역시 내가 가져온 김치가 전부인 초라하기 그지없는 식사였다. 낯선 장소와 분위기에 압도당한 난 저녁식사 후,
" 저기, 집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해야 하는데..."
라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선이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부터 내게 곁을 주지 않았다. 선이 선배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나를 밀착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중전화 부스까지 따라왔고 엄마와의 통화도 엿들었다. 잠을 잘 때는 더욱더 난감하고 기이했다. 속옷만 입고 자라는 요구였다. 난 한여름에도 속옷만 입고 자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겨울 중에서도 가장 추운 달인 1월에 속옷만 입고 자라니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그들의 논리는 홍보하는 제품인 이불을 신체에 최대한 밀착시켜 포근함을 제대로 느껴봐야 고객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내가 느끼기엔 밤 탈출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 같았다.
다음 날 새벽 4시가 되자 모두 일제히 일어나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씻는 소리, 머리 말리는 드라이기 소리,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그야말로 난리난리 생난리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전날 저녁식사와 똑같은 밥과 반찬을 해 먹었고 곱게 화장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나를 포함 10명이 넘는 아가씨들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강남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거칠고 불친절한 버스는 성남에서 강남까지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달렸다. 몸이 이리저리 사정없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난 그들을 살폈다. 아니 사실 선이를 찾았다는 게 맞다. 선이는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무표정하고 지친 얼굴로 짙게 깔린 차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20대의 젊은 남자들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성남에서 왔다고 했다. 아마도 같은 지역에 방을 구해 남자방과 여자방을 나누어 생활하는 듯 보였다. 종일 교육을 받았다. 내용은 '다단계' 영어로는 MLM (Multi-Level Marketing) 합법적인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며 '합법'을 강조했다. 앞으로 살아남을 유통망은 이것밖에 없다며 미래 신산업인 듯 설명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온라인 쇼핑과 택배산업이 발달하기 전이라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했었다. 이러한 날들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사이 통장을 보여주며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얼마나 많은 나라를 여행했는지를 자랑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옷은 왜 단벌인지, 왜 늘 값싼 점심을 먹는지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또한 나를 거북하고 질리게 만들었던 건 사이비 종교단체처럼 손뼉 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부자가 되기 위한 몸부림은 꼭 광신도들 같았다. 그렇게 의심과 분노가 차오르고 있을 때 한보그룹의 최종 부도가 보도되었다. 그곳에 있던 선이와 그녀의 직장동료들은 환호를 했다.
아무리 경제에 무지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을 것이다.
실직, 파산, 가족해체...
그들은 한보 실업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회원이 될 것이라며 기뻐할 뿐이었다.
선이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