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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부엉이 J May 21. 2023

과거를 소비하는 레트로 트렌드는 어째서 대세가 되었을까


2023년 1월 4일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바로 다음 달에 누적 관객수 30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하였습니다. 만화 슬램덩크가 우리나라에 정식 발매된 연도가 1992년인 것을 생각하면, 시대를 초월하여 인기를 끌게 만드는 레트로 콘텐츠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레트로(retro)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흐름으로 '복고주의', '복고풍'이라고도 불린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레트로 즉 복고주의는 요즘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기에, 시대를 막론하고 복고주의는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1975년 조선일보 기사 ’흘러간 노래 復古(복고)붐’에는 ‘지나간 노래가 주목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1982년 매일경제 기사 ‘캐러멜·글자비스킷 복고무드과자 인기’에도 ‘20여 년 전 유행한 어린이 과자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언급되었습니다. 이처럼 복고는 시대를 가리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인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복고주의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식욕을 가지고 있지만 배가 고플 때와 배가 부를 때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처럼, 환경에 따라서 레트로 현상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위의 기사에서 확인되듯 우리나라의 경우 1970~80년대도 복고주의가 주목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슈가 된 시기는 1997년 IMF 직후입니다.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꿈과 희망이 있었던 과거를 추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대별로 다른 양상을 보였던 복고주의가 ‘레트로 트렌드’가 될 정도로 현재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트렌드가 되었다는 의미는 레트로의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5~10년에 걸친 장기간 동안 동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저성장 시대로의 전환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


첫번째는 저성장 시대로의 전환입니다. IMF를 기점으로 고성장 시대는 끝났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는 노동, 자본 등 생산요소를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성장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땅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공장만 지어도 GDP(국내총생산)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땅마다 공장을 다 지어버리면, 더 이상 공장을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공장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예전에 공장에서 1시간마다 10개씩 물건을 생산했다면 100개, 1000개씩 만들 수 있게 기술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투자비용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여서 경제성장을 하는 방법이 생산요소를 투입하는 성장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 것이죠. 





이런 경제구조의 변화 속에서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심화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의 파이가 잘 커지지 않으니, 이미 벌고 있는 돈을 어떻게 나눌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공정’이 이슈가 된 이유이죠.


즉, 우리나라 국민들은 앞으로 더 좋은 미래가 오는 것을 꿈꾸기 힘들어졌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현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욜로족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좋았던 과거를 예전보다 더 자주 보게 됩니다. 레트로 트렌드가 부상하게 됩니다. 



2. 공급과잉의 시대 

치열한 경쟁 속 개인화된 니즈를 가진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자 하는 공급자들


레트로 트렌드가 주목받게 된 두번째 이유는 공급이 수요를 능가하는 공급과잉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시절에는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생산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시절에는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며, 공급이 수요를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소비자들의 수요는 개별화, 다원화되었죠. 쌀밥으로 만족하던 사람들이 물건이 풍족해지니 파스타, 초밥 등 자신만의 취향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 사이에서 어떻게든 차별화를 하여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옛것’인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서 차별화를 할 수 있으나, 세상에 잊힌 무언가를 다시 발굴해서 차별화를 하는 것도 차별화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똑같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새로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기성세대에게는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는 새로움을, 신세대들은 지나갔다는 시간을 체험하는 새로움을. 





그래서 레트로(retro)에 새로움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new’를 더해서 ‘뉴트로’(newtro)라는 말이 탄생했습니다. 과거의 것이라고 해도, 아예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 나온 상품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슬램덩크 영화는 원작 만화를 아는 세대에게는 추억이겠지만 만화를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롭게 나온 영화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트로 콘텐츠’라고 무조건 성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기성세대에겐 추억을 불러오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세대의 마음도 울릴 수 있는 체계적인 기획이 필요한 것이죠. 최근에 소비자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포켓몬빵’, ‘슬램덩크 영화’의 이면에는,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수많은 레트로 상품들이 있는 것입니다. 



3. 도래한 빅데이터의 시대

사용자 데이터 기반 추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시간을 거슬러 주목받는 콘텐츠들


레트로 트렌드와 관련하여 최근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차트 역주행’입니다. 얼마 전 가수 윤하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이 화제를 모으며 차트를 역주행했습니다. 곡을 발표할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는데, SNS에서 올라온 대학 축제 라이브 영상을 통해 새롭게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죠.


또한 그전에는 2011년 데뷔 이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걸그룹 ‘브레이브걸스’가 노래 ‘롤린’이 차트 역주행을 하며 2021년에 대세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군대에서 공연하던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 화제가 된 것이 계기였습니다. 




차트 역주행이 가능했던 이유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운영하는 빅테크 기업들이 더 많은 사용자가 더 오랫동안 플랫폼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사용자 데이터 기반의 추천 알고리즘을 구성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추천은 기억에 의존하여 시간의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추천은 데이터에 기반하기에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콘텐츠에 목말라 있는 현대사회 사람들에게도 콘텐츠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에 레트로 콘텐츠들이 자주 등장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에는 오래되면 잊히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으면, 오래된 것들도 언제든지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의 전망

인구구조를 타고 부상하는 레트로 트렌드


레트로 상품 및 콘텐츠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행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원인인 저성장 시대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공급 과잉으로 인한 치열한 경쟁도 계속될 것이고, 빅테크 기업의 데이터 활용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고도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앞으로의 인구구조 또한 레트로 트렌드에게 웃어주고 있습니다. 2000년까지 60만 명 이상이었던 출생아 수가 2002년부터 40만 명 후반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부터 40만 명 초반으로 감소하더니, 2021년 기준 26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신세대가 줄어든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기성세대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은 새롭게 등장할 알파세대보다 구매력이 있으면서 인구가 많은 MZ세대를 지속적으로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밀레니얼 세대는 40대 중반을 향해 가며, 사회의 중심축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레트로 트렌드는 지속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 MZ세대도 기성세대가 되면 새롭게 등장하는 유행보다 기존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콘텐츠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니즈를 겨냥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것입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레트로라고 분류하는 것도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로 분명하게 구분되었던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과거에 당연했던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며, 뉴노멀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계속해서 답을 해나갈 수 있으면, 어떤 변화라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올해 초 LG에너지솔루션에 기고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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