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와 그들, 분리와 배제, 공존을 넘어 공생으로
“국회부터 학교까지, 생각을 달리하는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우리’와 ‘저들’을 금 긋고, ‘저들’에게 낙인을 찍어 ‘우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혐오 정치가 일상의 공포를 부추기지 않았던가. 여성, 성소수자, 난민,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은 물론, 이 혐오에 대한 자기 방어로 제 몸에 가시를 두르고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사회적 약자들까지 분리와 배제의 정치에 연루되면서 공포라는 감염은 무방비로 확산되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강박관념이 하나 있습니다. 길 가다가 외국인들을 볼 경우, 최대한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무례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잔뜩 의식하고 있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저는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을 탈 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만,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인식하는 경우는 뭔가 낯선 경우입니다. 지하철에서 고함을 치거나, 막 전화를 받으면서 화를 내는 경우 저절로 시선이 갑니다.
낯선 것에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익숙한 것과 달리 낯선 것은 생존에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위협이 된다고 느끼게 되면, 인식을 넘어서 경계를 하게 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진 이후 중국에서는 우한과 나머지,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인과 우리, 서양에서는 동양인과 서양인으로 분리하여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 하나하나의 경우를 살피는 것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고 편하기 때문에.
낯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나, 그렇다고 배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지만, 자국민은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히 생각합니다. 남이 아닌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우리는 ‘우리’를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가. 혹시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 혈통만을 우리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제가 외국인들을 인식하는 것을 결국 낯설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다양성을 생각했다면, 나는 외국인들을 인식하지 않았어야 했다’ 낯선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를 낯설게 보고 있냐는 것입니다. 다양성이란 결국 낯설지 않은 것의 확장, 우리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