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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Nov 11. 2020

로마인 이야기4(율리우스 카이사르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카이사르의 본격적인 갈리아 정복의 역사와 그 때까지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브리타니아와 라인강 동쪽 지역 원정의 대장정을 함께 떠나 보는 것은 너무도 흥분되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갈리아 전쟁 3년째(기원전 56년)

기원전 56년 "갈리아의 평화의 해" 로 명명되어진 이해 겨울, 카이사르 휘하 지휘관이었던 청년 크라수스가 겨울 숙영지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부대장 두명을 베네티족이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군에게 포로가 된 자기네 부족민과의 인질 교환을 요구한다. 보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그 협상을 보류하도록 한 후에 현지로 들어간다. 로마군에 저항하기로 결정한 몇개 부족의 연합군과 맞서서 카이사르는 5만의 병력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전선에 배치한다. 또한 카이사르는 해안 부족인 베네티족과의 전투를 위해 해군을 동원한다. 전함간의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는 항해술이 뛰어난 베네티 족이 우세하지만 함선이 붙어서 적선에 오르기만 한다면 로마군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 청년 부루투스의 해군은 밧줄에 낫을 달아 적 함선을 결박하는 작전을 통해 갈리아 연합해군을 완파해 버린다. 그리고 패배한 갈리아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투항한다. 

해전의 승리와는 별개로 다섯방향으로 갈리아 지역 여러군데로 진군한 로마군은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한다. 그해 숙영지로 돌아가기 전 마무리로 베네티족에 군사를 빌려 준 모리나족과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로 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그 두 부족의 영토에 들어갔을 뿐 적들이 더 깊은 숲속으로 숨어버린 탓에 철군하게 된다.


갈리아 전쟁 4년째(기원전 55년)

갈리아 전쟁 4년째가 되는 기원전 55년은 카이사르에게 큰 도전의 한해가 된다. 바로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땅을 최초로 밟게 되는 해이다. 이해는 루카 회담에서 합의 된 대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을 맡게 된다. 라인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던 가장 강력한 부족은 수에비족이었고 병력은 10만 정도였다. 또하나의 세력은 군사력은 강하지 않지만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 우비족이다. 기원전 55년 수에비 족의 침공을 받은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영토로 넘어오게 된다. 이 와중에 이들 게르만 기병대가 로마기병대를 습격하여 로마군 기병 74기를 잃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때까지 이들과 화친을 추진하던 카이사르는 전략을 바꾸어 이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한다. 전투는 싱겁게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다. 카이사르는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갈리아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라인강 도하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대규모 병력을 짧은 시간에 도하 시키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다리 건설은 이전까지 배를 통해서 강을 건너던 방식을 미개하게 만들어 버렸다.

라인강을 대규모 병력의 도하 작전이 가능케 만든 카이사르의 다리 건설이 마무리 되고 마침내 로마군이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의 수감브리족의 땅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던 게르만족의 대다수 부족은 그에게 사절을 보내 화친을 요구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모두 수용하고 다시 라인강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다리의 절반을 파괴한다.

라인강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는 이제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를 침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브리타니아 침공의 명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갈리아 부족의 봉기와 이 영토 내에서의 전투는 항상 브리타니아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로의 진격은 불가피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상인들의 왕래조차 뜸했던 브리타니아로의 진군은 그에게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침공 준비 소식이 전해지자 브리타니아는 사절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고 카이사르는 이를 수락한다. 기원전 55년 8월 26일 두개 군단을 태운 80척의 수송선이 항구를 떠나면서 카이사르의 첫번째 브리타니아 침공은 시작된다. 브리타니아 해안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은 브리타니아 군의 저항과 만나게 된다. 해안에 상륙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수송선에서 규모가 작고 노를 저어 이동하는 갤리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상륙작전을 하게 하는데,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해병대가 해안 상륙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의 모태가 되었다. 육지에 무사히 도착한 카이사르의 군대는 기병이 없다는 문제, 식량문제  그리고 적의 공격으로 부터 방어하는 수비의 문제가 있었다. 브리타니아 군의 저항은 기동력을 앞세운 전차를 활용하여 적극적이고 거셌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무적의 10군단이 있었다. 브리타니아 군은 쉽게 제압 당했고 카이사르에게 재차 강화를 요청해 왔다. 카이사르는 이를 수용하고 1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어렵사리 마치고 다시 도버해협을 건너 돌아오게 된다. 기원전 55년 말 카이사르는 그가 너무나도 아끼던 장군 중 한명이었던 청년 크라수스를 최정예 기병 1천기와 함께 그의 아버지이자 삼두 중 한 명인 크라수스에게 보낸다.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그의 아버지 크라수스가 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떠나 보낸 것이 그와는 마지막 이었다.


갈리아 전쟁 5년 째(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2차 브리타니아 정복 전쟁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그 전에 갈리아 최강의 기병을 보유한 티레베리족을 먼저 제압한다. 지난 1차 원정과는 달리 이번엔 병력이 무려 5개 군단과 기병 2천기가 동행한다.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쉽게 육지에 상륙하게 되고 원정길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도착 다음날 부터 몰아닥친 폭풍우로 상당한 선박이 피해를 입게 된다. 내륙으로 18킬로미터 정도 진군했을 때 카시벨라우누스 가 이끄는 브리타니아 군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싸움을 하기 보다는 회피하며 게릴라 전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기습 작전에 초기엔 고전했으나 카이사르를 막기엔 그들의 전투력은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타메시스 강(오늘날의 템스강) 을 건너 진격한 로마군에게 브리타니아 군은 여지없이 패하고 만다. 마침내 브리타니아는 카이사르에게 굴복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브리타니아 원정을 무사히 마친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인질들을 데리고 회군한다.

기원전 54년과 53년에 걸친 겨울, 갈리아 지방 밀작황이 좋지 않아 병력이 분산되었다. 식량 등의 문제로 부대를 이동하던 사비누스와 코타의 15개 대대 9천명의 병사가 에부로네스 족의 반란으로 살육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에부로네스 족과 합세한 갈리아 족 6만명의 군대는 퀸티우스 키케로의 숙영지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뒤늦게 이사실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급히 군단 소집을 명하고 키케로의 숙영지로 이동하는 중에 군단병력과 합류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접근을 알게된 갈리아 족 군대는 카이사르와 일전을 위해 포위를 풀고 카이사르 군단이 있는 쪽으로 이동한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로마군의 포위망 안으로 유인하여 공격한다.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나고 만다.


갈리아 전쟁 6년째(기원전 53년)

갈리아 전쟁 6년째에 접어든 카이사르는 휘하에 8개군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원로원으로 부터 인정 받은 4개 군단 병력의 2배이다. 갈리아 전쟁 6년 째의 카이사르의 목표는 갈리아 북동부를 완전히 정벌하고 라인강 동쪽 게르만에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었다. 로마군 15개 대대 9천명을 살상한 에부로네스 족의 암비오릭스 족장이 아직 살아 있었다. 명분은 분명하다. 그를 잡아 항목을 받고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 부족장 회의를 소집하고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부족들에게는 군대를 보내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강화했다. 트레베리족은 마지막 까지 로마군에 저항하다 마침내 전투를 통해 굴복시킨다.

그리고 곧장 2차 라인강 도하를 통해 게르만 족의 기세를 완전히 꺽어 버린다. 그리고 게르만 족에게 로마군이 지켜보고 있다는 상징의 의미로 일부 파괴된 다리에 망루을 세우고 군대를 주둔 시킨다.

한편 이시기에 시리아 총독으로 가 있던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게 되는데 그 전쟁에서 로마사에서 가장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도 전사하게 된다. 그가 잃은 것은 무려 7개 군단의 병력과 지휘관 그리고 군단기 들이었다.


걸리아 전쟁 7년째(기원전 52년)

이 해가 카이사르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완전히 자신의 지배권 하에 놓았다고 생각했던 갈리아 지역 대부분의 부족이 로마에 반기를 든 사건이 발생한다. 아르베르니 족의 족장이었던 베르킨게토릭스 가 갈리아 부족을 통합하여 사령관이 되어서 카이사르에게 맞서게 된다.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 병력들은 겨울 숙영을 위해 떨어져 있었다. 갈리아 반란을 확인한 카이사르는 눈덮힌 겨울 산을 넘어 자신의 군대와 합류한다. 카이사르가 10개 군단과 합류했다면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투리게스족의 요새인 상세르에서 적장과 처음 마주하게 되는데 전투는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난다. 이제 정상적인 전투로써는 카이사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반란군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며 게릴라 기습전과 후퇴작전으로 일관한다.

로마군과 반란군과의 공성전은 부르주에서 벌어진다. 승리를 자신하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카이사르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연설을 통해 사기 충천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충성심이라는 화살을 심장에 꽂아버린다.

나는 너희들의 의욕이 충분한 것을 알고 있다. 나에게 영광을 안겨주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너희들의 목숨보다 나 자신의 영광을 중시한다면 지휘관으로써 실격이다.

충성심에 불타는 로마군에 의해 부르주 성은 함락되고 만다. 반란을 진압하긴 했지만, 카이사르는 중부갈리아의 최대 부족이면서 동맹자인 하이두이족의 내분 문제와 프로빈키아 속주 방어 문제 등으로 5년간의 정복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철군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까지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 동안 잘 참고 있던 갈리아 군 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 가 남부로 철군하던 카이사르의 군대를 향해 총공격을 감행 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단숨에 적을 제압하고 반전을 이루게 되는데, 갈리아 군은 알레시아로 도망가게 된다. 고지대에 위치한 알렌시아 성을 로마군이 포위했다. 그런데 그 로마군을 다시 갈리아 원병들이 포위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것 마저도 예측하고 양쪽을 모두 방어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한다.

알레시아 성 내부 병력은 식량 문제로 더 버티기가 곤란한 지경에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52년 9월20일 갈리아의 구원군이 도착했다. 로마군은 앞뒤로 공격해 오는 적과 마주하게 된다. 25만명의 갈리아군은 4명의 사령관이 나누어 지휘하도록 했다. 마침내 사흘간 지속된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5만명도 채안되는 로마군이 안쪽 8만 바깥쪽 26만명의 군대와 싸워 이긴 것이다. 그 승리 속에는 카이사르 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전쟁에서 패한 적장은 카이사르에게 자신이 스스로 포로가 될테니 병사들에겐 최대한의 선처를 부탁했다. 

이로써 갈리아 지방 부족 전체가 합심하여 일으킨 로마에 대한 항전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갈리아 전쟁 8년째(기원전 51년)

알에시아 공방전으로 체력이 고갈난 병사들을 푹 쉬게 한 후 기원전 52년 12월 카이사르는 마침내 갈리아 전 지역을 부채꼴 모양으로 도는 원정길에 오른다. 오를레앙을 출발점으로 하여 갈리아 각 지역으로 행군하게 된다.

알레시아 전후 저리 1단계는 기원전 51년 여름에 이렇게 마무리 된다.

전후 처리 2단계는 갈리아의 로마화 였다. 부족 지도자 계급의 자녀들을 로마나 프로빈키아 속주로 보내 공부시킨다. 사제계급은 그대로 유지한다. 통상을 장려하고 광산개발을 촉진하여 경제 부흥, 갈리아 전체에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 의 직접세 의무 부과 등이 그것이었다.

마침내 8년간의 갈리아 정복이 끝나고 전후 처리도 마무리 한 카이사르가 알프스를 넘어 키살피나 속주로 간 것은 기원전 50년이었다.

위대한 카이사르에게도 위기는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 위기 앞에서 늘 그는 당당했고 그 위기를 역전할 수 있는 때를 간파하고 미리 준비한 것들을 그 시간에 완전히 쏟아 부음으로써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어떤이는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떤이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어떤이는 목적 자체를 상실하고 산다. 카이사르 처럼 인류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열심으로 갈고 닦으며 준비한다면 내가 그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것이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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