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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Jan 03. 2021

로마인 이야기5(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권은 유럽 전역을 정복한 카이사르가 마침내 루비콘을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진입하여 폼페이우스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가 그렇게 원했던 제국 건설의 초속을 다지는 위대한 정치개혁을 포함한 제도 개혁을 시작하지만 아쉽게 숙적들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암살되고 그 후에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숙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본국으로 들어오려는 카이사르에게 로마 원로원은 무장해제와 군대해산을 요구하며 폼페이우스를 내세워 압박을 가한다. 마침내 로마의 두 위대한 영웅들 간의 전쟁, 곧 로마 내전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카이사르와 그의 무적 군단은 이를 무시하고 루비콘을 넘어 로마를 향해 진군하고, 이를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9년 1월 17일 로마를 떠나 반도의 남쪽으로 떠난다.

폼페이우스 일행은 2월25일  그리스로 가기 위한 항구도시인 브린디시에 도착하게 된다. 카이사르 군단의 남하 소식을 들은 이들은 무력하게도 본토를 버리고 3월4일 브린디시를 떠나 그리스로 넘어가게 된다.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넘어간 것은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오리엔트와 지중해 국가들이기 때문에 그에게 매우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지도를 통해 당시 두 사람의 영향력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 도하 후 단 2개월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게 된다. 물론 폼페이우스와 이를 지지하는 원로원 파의 저항이라는 숙제는 그대로 남아있긴 했다.

기원전 49년 4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무장한 채로 루비콘 강을 건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 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휘하의 세장수가 점령하고 있는 에스파냐로 떠난다. 에스파냐로 들어가는 관문인 마르세유를 만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마르세유와의 전투를 트레보니우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곳을 지나쳐 서쪽을 향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레리다에 도착한 것은 6월22일 이었다. 에스파냐 전쟁은 폼페이우스 진영의 7만8천의 보병, 5천의 기병 과 카이사르 진영의 2만 7천명의 보병과 3천의 기병 간의 회전으로 이루어 진다. 카이사르 가 에스파냐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동안 데키우스 브루투스의 해군이 폼페이우스의 함선을 격파하게 된다. 적과의 대치 국면에서의 역전을 위해 수로를 파게 되는데, 이것으로 인해 전선은 카이사르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게 되고 7월25일 밤 폼페이우스 진영의 군단은 전산을 뒤로 미루는 후퇴를 감행하게 된다. 승기를 잡은 카이사르는 이들을 궁지로 몰게 되고 결국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 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게 된다. 마침내 저항군에 대해 승리를 가두었지만, 그는 군단 해산을 명할 뿐 저들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8월2일 레리다 도착 후 일주일 만에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해산시키는데 성공한다. 카이사르는 동족의 피를 최소화 하기 위해 인내하며 기다림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에스파냐를 점령해 나갔다. 10월25일 저항하던 마르세유도 카이사르에게 함락 당한다. 카이사르 군의 승기가 확실해 지자 정예병들과 그 군단을 중심으로 보수의 향상을 위해 파업을 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이에 대해서도 단호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한편, 카이사르의 명을 받은 쿠리오의 군단은 시칠리아를 쉽게 점령하고 여새를 몰아 북아프리카에 기원전 49년 8월11일에 상륙한다. 누미디아 코끼리 부대의 진격 소식을 들은 쿠리오 군단은 사기를 잃게 되고 코르넬리우스 진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누미디아 군대는 쿠리오 군단 2만명을 몰살 시킨다. 한편 아드리해의 재해권 탈취를 위해 보낸 안토니우스와 돌라벨라 군단 중 돌라벨라의 군단이 폼페이우스의 해군에 패하게 됨으로써 카이사르는 두번의 연속되는 뼈아픈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독재관의 자리를 요구하게 되고, 원로원의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독재관 이후 12월13일 카이사르는 브린디시로 떠난다. 폼페이우스 군단과 전투를 하기 위해 출발하는 카이사르의 군대는 상대적으로 열세인 것이 분명하다. 경제력, 군사 규모, 참모의 능력 등 어느 하나에서도 카이사르 군대가 우위에 있는 것이 없었다. 겨울 바다를 건너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건너가는데 성공한다.

기원전 48년 1월5일 카이사르의 1진이 오리쿰에 상륙한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이끌고 올 2진과 3진을 기다리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며 외교전을 벌이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다. 그해 3월 26일 브린디시를 출발한 안토니우스의 2진은 처음 계획되었던 아폴로니아가 아니라 이보다 북단인 리수스에 상륙하게 된다. 이들은 4월 3일 마침내 합류하게 된다. 폼페이우스와의 첫번째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는 승리도 패배도 하진 않았지만 전세의 불리함을 인지하고 7월6일 의 대 전투 후에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게 된다.

주변의 지원을 최소화한 상태로 결전을 치르기 위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군단을 내륙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대회전을 벌이게 된다. 숫적 열세, 전력의 열세를 카이사르는 그간의 전술을 뒤집는 기가막힌 전술을 통해 적의 기병을 무력화 함으로써 승리를 가져오게 된다. 기원전 48년 8월9일 '파르살로스 회전' 이라고 불리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대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완승을 거두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수고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하려하는데, 카이사르에게로 패권이 넘어간 것을 눈치 챈 이집트는 그를 살해 하게된다. 기원전 48년 9월28일 폼페이우스 58세 였다. 그의 죽음 후 이집트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이집트 를 위해 오누이가 화해하고 공동 통치할 것으로 명령한다. 이 명령에 불만을 품은 남동생이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게 되어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 또한 카이사르의 승리로 평정되게 된다.

이제 폼페이우스의 내전까지 모두 마무리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9월 로마로 돌아온다. 이제 다시 폼페이우스의 남은 세력인 북아프리카만 평정한다면 모든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완성된다. 그 때 그의 주력 군단인 10군단 병사들이 자신들의 성과와 필요성을 알아차리고 급료 인상을 위해 제대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 때 카이사르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다.

나의 전우, 나의 군단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나에 무엇을 원하는가?
제대를 원합니다.
그러한가. 제대를 허락한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의 급료도 그 밖의 보수도....

사령관의 냉당함에 그들은 다시 그의 병사로 싸우게 해 달라고 오히려 메달리게 된다.  이후에도 카이사르는 이들에게 출동명령을 유보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이들의 충성심을 끌어낸다. 로마로 돌아온 그가 풀어내야 할 숙제를 지혜롭게 잘 처리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출병을 잘 준비하게 된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는 아직 저항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출병한다. 경험이 일천한 신병들과 먼저 도착한 카이사르는 아듬해 도착하는 고참병들을 기다리며 다양한 전술과 검술로 저들을 단련시킨다.  3진과 4진 등 모든 전력이 집결한 후 탑수스 회전이 벌어진다.

기원전46년4월6일 새벽에 시작된 탑수스 회전에서 기상천외한 전술을 통해 적병 1만명의 전사자를 만들어 내면서 카이사르의 대승으로 끝난다. 탑수스에서 패한 카토의 군단은 우티카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결전을 하고 싶었으나 우티카의 주민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카토는 자살하게 되도 다음날 카이사르는 우티카에 입성한다. 그리고 54세를 맞이한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위해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개선식은 한꺼번에 4가지의 개선식을 매일 갖게된다.

첫째날은 갈리아인에 대한 승리, 둘째날은 이집트에 대한 승리, 셋째날은 폰토스 왕에 대한 승리, 넷째날은 누비디아 왕 유바에 대한 승리로 열렸다.

개선식의 주인공인 개선장군의 우쭐댐에 찬물을 끼얹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전통인데 이 때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이 외친 구호는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였다. 개선식 중에는 참석자들에게 큰 잔치를 장병들에게는 그 계급에 따라 상당한 보상금을 지급했다.

54세의 카이사르는 자신이 수립하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 를 내걸었다.

그의 개혁을 간략히 기술하면 "달력개정(율리유스력)-1년을 일년을 365일6시간으로 조정" "통화개혁""원로원 900명으로 확대하는 정치 개혁" "독재관의 결정을 추인하는 민회""호민관 유명무실화""종신독재관""행정개혁""해방노예의 등용""속주를 18 로 분활하는 속주 통치 개혁(아래 지도 참조)""재판 결과에 대해 민회에 항소하던 것을 독재관에게 항소토록하고, 법정 최고형을 사형에서 대신 추방형으로, 추방형은 범죄자 본인에게로 한정하는 사법개혁""밀의 무상 배급 인원을 최대 15만명으로 제한하는 복지 정책""실업 대책을 위한 식민 정책 개선""정치 조직화된 조합(콜레기움)의 해체""수도 경찰제도 도입""혼잡한 로마 교통 문제를 해소하긴 위한 교통 규제 도입""공공청소외에도 청소의 개인별 의무화""지나친 사치 금지법""상하수도 개발 및 도로 정비""수도 로마의 도시 정비 사업"  등등이다.

이 밖에도 "교사와 의사에게 시민권 부여""가도의 확충, 연장, 신규 건설, 항만 건설 등" 이 있다. 카이사르에게는 원로원이 모두 16가지의 특권을 인정하게 된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령관이자 정치가요 사회개혁자이면서 철학자였던 카이사르, 그는 공화정이 아닌 제국으로의 전환이야 말로 로마의 성장과 현재의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과 반대되는 쪽의 사람들도 있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동쪽의 국경을 곤고히 하고 오리엔트 지역의 안정을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화 했다. 출정일은 3월18일로 확정되었다. 출정식을 3일 앞둔 3우러15일 56세의 카이사르는 그의 정적들에 의해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열리기로 한 원로원 회의 전 살해된다.  그의 암살에 앞장선 사람들은 모두 16명, 그 중에서 이일을 실행한 인물은 마루쿠스 부르투스,카시우스 롱기누스, 툴리우스 킴브로,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데키우스 브루투스, 미니키우스 바실루스, 술피키우스 갈바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에 의해 카이사르는 무려 23군데에 상처를 입게되는데 가슴에 찔린 상처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들의 암살 행위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카이사르 군단 병들의 복수심을 불러 일으켜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3월16일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성난 군중에 의해 도망치게 된다.

카이사르의 갑작스런 죽음과 유언장의 공개로 인해 그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실망하게 되고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목한 당시 18세 였던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 유언장에서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에 대한 언급도 없자 클레오파트라 역시 실망하게 되며 안토니우스 편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그가 시행하려했던 개혁들이 멈출 것으로 기했던 반대파의 기대와는 달리 원로원은 그의 개혁 정책을 모두 승인하게 된다. 3월18일 카이사르 장례식을 기점으로 암살 가담자들은 로마에서 아주 먼 곳으로 도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카이사르가 없는 로마.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지위 강화에만 열믈 올리고 있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민심을 얻는데 주력하게 된다.

기원전43년 3월 옥타비아누스는 새로운 집정관과 함께 안토니우스와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싸우고 있는 모데나였다. 이들은 안토니우스를 잡기 위해서 출정했고, 안토니우스는 패배하고 서쪽으로 퇴각하게 된다. 원래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브루투스 휘하의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 진영으로 투항하게 되고 그는 결국 살행당한다.트레보니우스 역시 돌라벨라에게 죽임을 당한다. 마침내 19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허락을 받아 집정관에 오르게 되고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며, 비로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가 된다. 기원전 43년 11월 안토니우스, 레피둣, 옥타비아누스 의 제2차 삼두정치의 시대가 열린게 된다. 삼두청치의 첫번째 과제는 살생부 작성과 정적 제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격파 였다. 우선 원로원 위원중 130명을 처형했다. 키케로도 이 살생부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고 그도 처형되고 만다. 그의 나이 63세 였다.

한편, 카이사르 암살의 주범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그리스와 시리아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맞붙은 필리피 평원 전투에서 초반에는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가 승리했으나 카시우스의 패배와 자살 소식을 접한 브루투스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전투의 후반에는 완전이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연합군이 승리하고 브루투스는 자살하게 됨으로써 삼두정치의 목표는 일단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

필리피 회전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의 통치 지역을 나누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동쪽, 옥타비아누스는 서쪽을 맡게된다. 안토니우스는 여세를 몰아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자신이 이루어 보려고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에게 숙제를 주는데 자신의 동생과 아내의 내전을 통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카이사르가 붙여준 아그리파의 활약으로 페루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측근으로 외교력이 뛰어난 마이케나스를 등용하게 된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잘 설득하여 "브린디시 협정"을 이끌어낸다. 이는 삼두가 각각 로마의 영토를 분할 통치하는 협정이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만난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정식 결혼을 요구하는 그녀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로마에서는 용납되지 않은 이중결혼을 하게 된다. 이것은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고 그가 로마 시민의 신임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안토니우스는 보병10만 기병 1만의 군단을 거느리고 파르티아로 원정을 떠나지만 결국 패배하고 퇴각하게 된다. 한편 안토니우스의 지휘관들은 그들의 작전회의에 간섭하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서쪽 지역의 완전 제패를 달성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기원전 32년 31세의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정벌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삼두 중의 한 명인 안토니우스와의 일정을 위해 출병하게 된다. 3월 그리스 파트라스에 진영을 둔 안토니우스를 치기 위해 출항한다. 지상전을 우선하자는 휘하 지휘관들의 의견 대신에 해상전을 하자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수용한 안토니우스 덕분에 마침내 기원전 31년 9월2일 악티운 해전이 벌어지게 되고,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이 승리하게 된다.

초반 대등 또는 우위 였던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클레오파트라가 지휘하던 함선들의 대오 이탈과 그녀의 후퇴로 인해 패퇴하게 된다.

7월31일 옥타비아누스의 기병대와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큰 부상을 입고 퇴각하여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죽는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죽음을 공표하고 동시에 이집트 왕국을 영유하겠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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