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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의 힘 Jan 24. 2021

로마인 이야기6(팍스 로마나)

시오노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했던 인물이라면 역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아닐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지나 이번에는 그 터전위에서 앞으로의 로마 1000년의 토대를 만든 또한명의 위대한 정치가 이자 최초의 황제적 지위를 누렸던 율리우스 옥타비아누스에 관한 이야기 "팍스 로마나" 를 소개한다.


우리의 위대한 고구려 역사에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과도 흡사한 역사적 흐름이라 더욱 흥미롭다.


1. 통치전기(기원전 29년~기원전 19년)

악티움해전을 승리로 이끈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8월 사흘간의 개선식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카이사르를 기리는 신전 건설을 선포한다. 그리고 절대 권력자가 된 그는 자신이 구상했던 로마를 위한 개혁을 단행한다.

 1) 군비삭감 : 50만이었던 군사력을 16만8천명으로 줄인다.

 2) 국세조사 : 종래에 군사력으로 동원될 수 있는 17세 이상의 남자와 재산 조사 내용에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예를 포함한다. 그는 재임 중에 세번의 국세 조사를 실시한다.

 3) 영묘건설 : 향후 마우셀레움 아우구스티 라 불리는 황제의 묘를 건설한다.

 4) 정보공개 : 카이사르가 제정했던 정보 공개는 원료원 회의 다음날 포로로마노에 게시하는 것이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개정하여 속기록을 광장에 게시하는 대신에 공문서 보관소에 보관하고 누구나 열람 할 수 있도록 했다

 5) 원로원 : 카이사르 시대에 900명 정원이었던 의석수를 600명으로 감소 조정한다

 6) 정치체제 : 기원전 27년 1월13일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물론 그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그대로 유지한채로의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다.

    원로원이 그토록 바랐던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해 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존칭을 부여토록 원로원 만장일치로 통과 시킨다. 이로써 그에 대한 정식 명칭은 "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가 되었다.

 7) 내각 창설 : 제일인자인 자신을 보좌하는 위원회인 "콘실리움 프린케피움" 즉 내각을 창설한다. 원로원의 정례회의는 월2회, 그러나 내각은 제일인자의 필요에 따라 열리는 연중무휴의 조직이었다.

 8) 속주 재편성

  9) 안전보장 : 로마의 안전을 확고히 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한다.

 10) 서방재편 : 로마제국의 서방을 재편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가을 로마를 떠난다. 에스파냐 북쪽 산악민족 정벌은 아그리파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속주의 세제개정을 포함한 갈리아 속주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집중한다. 로마의 서방, 갈리아를 다섯 지방으로 나누는데 남프랑스 속주, 아퀴타니아 속주,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벨기카 속주, 게르마니아 속주로 나눈다.

  11) 국세청 창설 : 프로쿠라토르 임페리알레 라고 불리는 황제 직속의 국세청을 창설한다. 이의 목적은 속주세 징세의 공정성 확보, 세금 분배의 원활성, 통치의 연속성 확립에 있었다.

 12) 호민관 특권: 영구집정관을 사임한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 임명을 제안하다. 그리고 호민관의 권리를 개정한다. 신변불가침, 평민권리 대변, 평민집회 소집권, 정책입안권, 거부권 등이 그것이다.

 13) 화폐개혁

 14) 선거제도개혁 :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이외의 지역에서 투표한 결과를 인정토록 개정했다.

 15) 식량안보 : 아버지 카이사르가 시작했던 식량안보의 강화를 계승하여 식량청을 창설하고 식량청 장관을 두도록 했다. 물론 이또한 최고일인자가 임명권을 갖는다. 이뿐 아니라 공공사업청도 창설한다.

 16) 동방 재편성: 기원전 22년 시칠리아 섬을 시작으로하는 동방 재편성을 위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보가 시작된다. 기원전 22년 그리스로 건너간다.

  - 유대 : 친로마 성향의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 파르티아 : 동방에서 로마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파르티아 밖에 없었다. 기원전 21년5월12일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이 아닌 외교력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파르티아와의 평화협상을 성공시킨다. 

  기원전 19년 10월21일 아우구스투스는 동방재편의 목적을 모두 이루고 수도로마로 돌아온다.


2. 통치중기 (기원전 18년~기원전6년)

 사회가 안정화 되자 사람들은 자식을 적게 낳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시대조류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상류계급에서 이러한 풍조가 더욱 뚜렷했다. 인구 감소 등의 사회적 문제 해결의 대책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간통 및 혼외 정사에 관한 법"과 "정식 혼인에 관한 법"을 원로원에 제출한다.

또한 이혼을 금지하지는 않지만 이혼하기가 매우 어렵도록 규정을 개정한다.

 로마의 전통 신앙의 부활을 위해 5월31일 부터 사흘동한 "세기제" 라는 종교 축제를 열기로 결정한다.

 본토에서 북쪽으로 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알프스를 넘는 4개의 주요 루트 확보를 더욱 곤고히 한다. 

    북쪽의 영토 경계선을 도나우강으로 확정하여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도 기원전 16년과 기원전 15년 사이에 완성한다. 아울러 통치 초기에 개정한 군사제도를 재편성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군사제도 재편성함에 있어서의 기본 방침은

방위에 중점, 파르티아를 제외한 적들은 야만족, 상비군의 필요성, 병사의 노동 조건 향상, 안전보장에 필요한종합전략, 재원확보

이를 통해 그는 병역기간을 16년으로 축소, 퇴직금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연봉 또한 대폭 인상한다. 또한 제국 방위군을 25개 군단으로 정착한다. 제국 방위의 주력 군단 배치는 대략 아래와 같다.

  이러한 제국 전역의 방위군단 이외에 아우구스투스를 지키는 근위대(피라이토리아) 창설이다. 근위대는 9개의 대대로 구성되고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며 1천명에 달한다. 

 아우구스투스 통치 중기에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동지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왼팔이었던 또 한사람 마이케나스 마저 잃게 된다.

 제국 영토의 최북단 게르만족과의 경계선을 라인강에서 엘베강으로 밀어올리려는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그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트라수스는 기원전 9년 원정을 떠나게 되고 이 원정은 서기 16년까지 계속된다.

티베리우스는 도나우강 방어선을 강화하면서 북으로, 드라수스는 북에서 역으로 남하하는 방식의 전술을 펼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본국을 11개 주로 분할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한다. 이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동시에 성취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수도 로마를 14개의 구로 분할하고 11개주와 14개 구를 모두 "레기오" 라고 불랐다. 또한 수도로마를 265개 동으로 나누고 "바쿠스" 라고 했다. 아울러 인구 100만이 된 제국의 수도 로마의 치안을 담당한 경찰청장(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을 원로원 의원 중 집정관 경험자가 맡도록 했다. 물론, 소방청도 개설했다.

 기원전 9년 엘베강 원정으로 게르만 족의 영토에 있던 드루수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 진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또한 게르마니아 전선에 대한 대처 전략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이던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의 죽음 등의 문제와 맞물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아우구스투스를 떠나 로도스 섬으로 들어간다.


3. 통치 후기(기원정 5년~서기 14년)

 기원전 5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손자인 가이우스가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예정 집정관으로 선임해 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한다. 그리고 그를 정치 세력화하기 위해 가이우스를 총재로 하는 소년단(유벤투스) 를 창설한다.

60대에 접어든 아우구스투스, 그의 통치 말기에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혈육들의 추문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그를 국가의 아버지 " 국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 라고 불렀다. 제국의 동쪽인 유대 지역과 아르메니아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이우스를 동방으로 보내게 되고 서기 2년 파르티아와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는 조인식을 갖는다. 서기 2년은 그의 손자 루키우스가 죽은 해이기도 하지만 아들 티베리우스의 정계복귀 선언이 있었다. 한해 후인 서기 4년에 티베리우스가 완전히 복귀하지만 그의 손자 가이우스는 23세의 나이에 소아시아 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계에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제일인자 보좌위원회 상임위원" 으로 임명한다.

티베리우스는 서기 4년 게르마니아 2차 원정에 돌입한다.그 해에 그는 엘베강을 제외한 게르만 지역의 주요 3개 강을 모두 점령한다.

그리고 서기5년 마침내 로마군은 엘베강에 도착한다.

이후에 판토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서기7년과 8년 동안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으로써의 역할을 무사히 완성한다. 티베리우스가 반란군 진압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게르마니아 전선을 지키던 퀸틀리우스 바루스의 군단이 게르만 군대에 전멸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게르만 전선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게르만 지역으로의 진군 명령은 지연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최고 군통수권자인 이상 티베리우스의 군사적 행동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서기 13년이 되어서야 티베리우스는 군 최고통수권자의 지위를 아우구스투스로 부터 받게 되고 티베리우스는 마침내 서기 16년에 엘베강과 게르만 지역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 는 서기 14년 8월19일 76세의 나이로 세상를 떠난다. 그가 소원한대로 그의 아내 리비아의 품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우구스투스 가 죽기 얼마전 나폴리에서 만난 그의 백성들이 마음을 모아 황제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마도 "팍스 로마나" 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카이사르와 같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능력을 가진 천재같은 지도자도 있고,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300% 이상을 만들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그러한 것은 자신의 가장 믿을만한 조력자에게 흥쾌히 맡김으로써 시너지를 내는 지도자도 있다. 누가 더 뛰어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단지 역사가 그를 어떻게 불러 내느냐 가 더 기막힌 기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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