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알못 외며느리 제사 해방 투쟁기
딩동. 오랜만에 시누이와 서방님이 오셨다. 서먹했다. 시누이와 어머님이 못다 한 이야기를 왁자지껄하게 나누는 사이 남편과 서방님은 창고에서 병풍을 가져왔다. 큼지막한 병풍을 펴고 전날 만든 음식을 제사상 위로 날랐다. 남편의 주도로 서방님과 딸아이가 술을 따르고 몇 번씩이나 절을 했다. 드디어 제사가 끝났다.
차린 건 없지만 손품 발품 많이 들어간 음식을 가운데 두고 가족이 빙 둘러앉았다. 알맹이는 쏙 빠진 의미 없는 대화가 넘실거리는 사이 나는 최대한 빨리 목구멍으로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닦아댔는데도 주방 곳곳 눈길 돌릴 때마다 누런 기름때가 보였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내친김에 레인지 후드, 주방 벽까지 레몬수를 팍팍 뿌려 불려 놓고 그저께 산 까칠까칠한 수세미로 빡빡 문대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삶의 터전에서 아득바득 살아남으려 안 해본 일이 없으셨던 시아버님께 제사는 각별했다. 무조건 많이, 무조건 좋은 음식으로 상을 가득 채우셨고 제사음식 중 하나라도 빠뜨리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식들이 일가를 이루고 명절에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오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수줍은 듯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시아버님은 마치 당신 아버지의 혼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제사상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리곤 하셨다.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서 흡족하다고,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들어 죽겠다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너무 짠해서 나는 제사를 치르는 날이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아버님은 말년에 집을 떠나 계시다 치매와 함께 10년 만에 돌아오셨다.
“아이고, 저놈의 변덕 때문에 내가 내 명에 못 살지. 저 지랄 맞은 성격을 우짜꼬?”
며느리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시아버님이셨지만 가족들에겐 폭군이었던 아버님을 두고 어머님은 내게 변명처럼 말씀하셨다. 치매를 앓자 예전보다 더 거칠어진 아버님의 행동이 가끔 이해되지 않았지만, 당신의 수줍은 미소와 제사 때마다 촉촉해지던 눈가를 생각하면 그 행동마저 용서가 되었다. 그렇게 지랄 맞은 성격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자식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마치 아버님이 그동안 그들의 명줄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남편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고, 경찰 공무원이었던 서방님마저 잘 다니던 직장을 돌연 그만두었다. 비교적 평안하던 시누이네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말년에 치매를 앓으실 때 더 잘 대해 드리지 못해서 돌아가신 양반이 저주를 퍼붓는다고 생각하셨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제사상을 차리면 아버님이 노여움을 거두실 거라며 기제사와 명절 제사가 돌아오면 이삼 주 전부터 장을 보셨다. 제사가 버거운 짐이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수년 동안 정성들여 제사를 지내고 불공을 드리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현생을 치열하게 살던 나에게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주말 없이 일하느라 죽을 지경인데 명절날마저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이들을 위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기름진 전을 부치고 나물을 다듬고 음식을 만드는 것이 이상한 풍습처럼 여겨졌다. 아버지 제사에 자식들은 음식 준비는커녕 코빼기도 안 비추는데 성씨도 다른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싶어 명절이 다가오면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섰다. 이집 저집 싸 주고도 소쿠리 가득 남은 제사음식은 연휴 내내 질리도록 먹었다. 그러고도 남은 음식은 몇 달간 꽁꽁 얼려 놓았다 냉장고 청소할 때면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명절날 가족 간 만남도 제한할 때 나는 유방암 수술까지 받았다. 너무 지쳤다. 우울한 마음에 제주도로 홀로 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에게 선언해 버렸다. 이제부터 나는 비합리적인 제사상을 차리지 않겠다고. 자식들이 복을 받는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꼬장꼬장한 어머니와 명절 때마다 파업 피켓을 들고 줄기차게 우겨대는 아내 사이에서 남편은 위태롭게 줄타기했다.
호기롭게 선언하긴 했으나 연세 많은 시어머니가 쪼그려 앉아 혼자 음식 장만하는 모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준비를 도와드리고 명절 아침 제사를 지낸 후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후다닥 여행을 떠나곤 했다. 코로나는 그새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두르는, 유교적인 가풍을 자랑하던 친정이 놀랍게도 제사를 끊어 냈다. 어머님 친구분들도 자식들의 종교 문제와 건강 문제로 하나둘 제사를 물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도 제사를 향한 어머님의 열의는 식을 줄 몰랐다. 고부간에 잘 지내다가도 제사 이야기만 나오면 충돌했다. 연휴 첫날 기름 냄새 맡으며 각종 전을 굽고 있을 때 여행지에서 찍은 친구들의 사진이 SNS에 올라오면 괜히 심통이 났다. 골골거리며 제사 준비하는 어머님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한 달 전 큰마음 먹고 올해 고3인 딸아이와 이번 설 연휴에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고 숙소를 예약했다. 어머님께 미리 말씀드려 달라며 남편에게 여러 번 부탁했다. 남편은 또 중간에 끼어 곤란해질까 걱정이 되었는지 차일피일 미루다 설날 연휴 전날 밤에야 어머니께 겨우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막상 다음 날 아침 우리가 짐을 꾸려 나서는 모습을 보고 역정을 내셨다. 이럴 거면 장보기 전에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며 어머님은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셨다.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님의 불같은 노여움에 도저히 집을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이 어쩔 줄 몰라 하다 여행은 다음에 가자며 옷을 다시 갈아입고 나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은 화도 나고 민망하기도 한지 사무실로 줄행랑을 쳤다. 기분이 상하고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시 주저앉아 앞치마를 두르고 입이 툭 튀어나와 전을 부치고 음식 준비를 할 수밖에. 어머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화를 푸셨지만, 생각이 많은 얼굴이셨다.
“이제 제사 그만 지낼라꼬. 힘들어서 더는 못 해.”
제사상으로 내어 갈 과일을 씻어 담고 있는데 어머님이 한마디 툭 던지셨다. 시누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엄마, 안 섭섭하겠나?”
남편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요즘 명절 제사 지내는 집도 점점 줄고 어머니 건강도 예전만큼 좋지 않으니 그렇게 하자며 한목소리를 보탰다. 그동안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콧방귀도 안 뀌던 어머님이 먼저 운을 띄워주시니 제사 종결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만장일치로 대동단결하는 자식들을 보며 쓴 미소를 지으시던 어머님은 제사 마지막 절을 마칠 때 조부모님과 아버님께 이제 이리로 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리라 했다.
“어머니 건강이 안 좋으니 다음부터 모든 제사는 산소에서 간소하게 지내겠습니다. 이제 집으로 오시지 말고 산소로 오세요.” 마지막 절을 끝내고 남편은 마치 결혼식 피로연장 안내하듯 깍듯하게 예를 갖춰 말했다.
갑자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어 나는 마침 집에 있던 커피 믹스를 타서 한 잔씩 돌렸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시누이와 서방님이 고꾸라지면서 웃기 시작했다.
“언니, 이거 커피국이에요? 엄마! 제사 그만두길 진짜 잘 결정했다. 언니가 만든 음식 드시다가 조상님 제사 다시 치를 뻔했네.”
남은 음식을 나누어 담으며 우리는 한참 깔깔거렸다. 레몬수를 흥건하게 뿌려 놓은 선반과 벽의 기름때를 빳빳한 수세미로 온 힘을 다해 박박 문질렀다. 누런 기름때가 수세미 가득 묻어 나오자 선반과 벽은 원래의 색깔로 돌아와 반짝반짝 빛났다.
* 나름대로 열심히 투쟁했지만 제사는 어머님의 짧고 굵은 한 말씀으로 이렇게 어이없이 종결되었습니다. 다음 명절에는 며느리도 시어머니도 앞치마 풀고 좋아하는 음식 나누어 먹으며 온 가족 함께 돌아가신 아버님을 추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