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만 하고 시작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들
나에게는 불치병이 있다. 조용히 잠복하다 각 잡고 공부나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발병하는 이 병은 한번 걸리면 언제 완쾌될지 알 수 없고 예방도 할 수 없으며 약도 없다. TV채널을 돌리다 나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우를 만났다. <응답하라 1988>의 고3이 된 덕선이었다. 공부와는 담쌓고 살던 그녀가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독서실에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밥을 먹다 어리둥절한 식구들에게 이제 대학 가야 하니 열심히 공부하겠다 큰소리친 후였다. 주변이 깨끗해야 공부도 잘되는 법. 독서실 책상을 온 힘을 다해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고 책을 높낮이 순으로 정렬하는 덕선.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이왕 청소하는 김에 가방과 사물함도 정리하고 책상 닦던 휴지로 바닥도 닦았다. 이제 새로 산 다이어리를 펼쳐 형형색색 화려하고 빼곡하게 적을 차례다. 앞으로의 계획과 다짐까지 깨알같이 적고 나니 몸이 뻐근했다.
‘아! 너무 피곤한데. 조금만 자고 일어나 공부할까?’
따뜻한 바닥에 지친 몸을 누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떠 보니 벌써 하루해가 다 갔다. 홀로 블랙홀을 떠도는 듯한 섬뜩한 기분, 느껴본 적 있는가? 어른이 되면 치유될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 병은 그 후로도 종종 나타나더니 이윽고 주위 사람에게도 마수의 손길을 드리웠다.
청출어람.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은 기본으로 아는 똑똑한 제자들을 둔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다. 가엾게도 이제 스승의 오랜 지병에 옮아버렸지만. 청출어람. 뛰어나다 못해 불치병 마저 스승을 가볍게 뛰어넘은 엉뚱한 제자들이 여기 있다.
크리스마스 전 초등부 마지막 반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날 몇 시까지 학원에 나오냐고 물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 모두 크리스마스트리 꼬마전구처럼 여기저기서 눈을 반짝거리며 잔뜩 기대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비록 어제의 평범한 일상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학원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그렇지 않다. 지난 시간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고, 누가 과제를 통과 못 해 다시 해 오기로 했는지, 심지어 매주 바뀌는 자리까지도 내 기억을 따라올 자가 없다. 그런 내가 크리스마스에 학원에 오라고 했다는 말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진술로 흩어진 기억을 하나씩 조합해 보았다. 매시간 시험과 과제가 있어 너무 힘들다며 아이들이 하루만 놀고 싶다 투정 부렸던 일이 떠올랐다. 지나가는 말로 다음에 한번 놀자고도 했다. 여기서 내가 말한 ‘다음’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절대 오지 않을 머나먼 미래의 어느 날’을 뜻했다. 매사 칼 같은 동우가 25일이 어떠냐며 쐐기를 박으려는 순간, 이중 주차해 둔 차를 빼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급하게 열쇠를 챙겨 나서느라 아이들의 기대로 가득 찬 질문을 귀띔으로 ‘응 응’하며 들었던 내 불찰이었다.
동우가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쥐고 애원했다.
“선생님, 제발요. 우리 그날 오전부터 나와 놀아요.”
한창 뛰어놀 나이에 매일 학원에 나와 공부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요 개구쟁이 녀석들이 또 무슨 작당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버럭 고함질렀다.
“정 그러면 오늘만 수업하지 말고 놀아요.” 아이들은 굴하지 않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중등부로 올라갈 아이들이라 서둘러 마무리해야 할 교재만 두 권이었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교재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 제발요!”
제아무리 뭐라고 하든 일단 큰 목소리로 제압하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수업을 시작하곤 했다. 칭얼 대어본들 누가 손해를 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도무지 수긍하고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입이 코보다 더 튀어나온 아이들을 보니 웃음이 피식 났다. 평소에 말썽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의 연말 소원 하나쯤 들어준 들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좋아. 그래도 이 황금 같은 시간을 게임에 다 쓸 순 없어. 절반은 열심히 공부하고 게임은 나머지 시간에 하는 거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환호 속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게임데이가 열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몰랐다. 그들의 야심 찬 계략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교재를 가방에 집어넣고 책상 정리를 하며 아이들이 로보 77을 하자고 졸랐다. 로보 77은 수학 연산을 하며 숫자를 영어로 말해보는 연습을 할 수 있어 유용한 보드게임이다. 뒤집힌 카드를 한 장씩 가져와 자신이 가진 카드의 수를 더해 누적된 숫자 77 이상을 부르는 사람은 부여받은 칩을 반납해야 하며 칩을 모두 잃는 사람이 게임에서 진다. 특수카드를 적절히 사용하면 총합을 조절하거나 순서를 바꾸어 게임의 흐름을 바꾸거나 반전을 꾀할 수도 있어 은근히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다.
“순서 정해야죠.”
꼭 게임 못 하는 것들이 순서에 목숨을 건다. 시간이 없으니 주사위 던져서 숫자가 많이 나오는 사람 순으로 하자고 했더니 기어이 선반에 모셔둔 초록 악어를 들고 와 순서를 가리자 했다. 악어 이빨을 무작위로 누르면 복불복으로 갑자기 입이 닫히는 장난감이다. 서로 먼저 누르겠다며 덤비더니 이번엔 악어 이빨 누르는 순서를 정하는 게 좋겠다며 영균이가 제안했다.
“순서 정하다 날 새겠다. 그냥 가위바위보 해!” 시계를 보며 내가 소리쳤다.
“그럼 너무 싱겁잖아요. 모든 게 완벽해야죠. 주사위 굴려요.”
정말 이놈들은 뭐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주사위를 굴리는데도 무슨 놈의 규칙이 그렇게 많은지 책상에서 떨어지면 꽝, 살짝 놓아도 꽝, 던져도 꽝, 별별 규칙을 다 늘어놓았다.
“그냥 던져!!!” 고함을 꽥 질렀지만 들리지 않는 듯 이번엔 주사위 굴리는 순서를 정해야 한다며 난리를 쳤다.
“시간이 없다. 가위바위보로 해!”
짜증 섞인 내 한마디에 아이들은 마지못해 가위바위보를 했고 그제야 수민이, 동우, 영균이, 진우 순으로 주사위를 굴릴 수 있게 되었다.
순서 정하기에 어찌나 공을 들였던지 주사위를 한번 굴리고 나니 어느새 20분이 흘렀다. 주사위가 데굴데굴 굴러가 바닥에 떨어져 무효가 되길 몇 차례, 드디어 주사위 굴리기 승부가 났다. 그래봐야 동우, 영균이, 수민이, 진우 순으로 악어 이빨을 누를 순서가 매겨진 것뿐이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장난감 악어에 이상하게 긴장한 동우가 숨을 참더니 손가락을 벌벌 떨며 이빨 하나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다행히 악어 입은 닫히지 않았다. 다음 차례인 영균이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오른쪽 가장자리 악어 이빨을 눌렀다.
“아 씨! 다행이야. 이게 뭐라고 떨었잖아!”
거침없는 수민이의 손가락은 영균이가 악어에서 손을 떼자마자 이미 이빨 하나를 꾹 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타자 진우는 이제껏 아무도 걸리지 않으니 불안한지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나 뭐 누를까?”
“그냥 아무거나 눌러!” 짜증이 솟구쳐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진우는 눈치를 보며 아이들이 누르라며 손짓하는 이빨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아마도 저러다 걸리면 남 탓하려는 의도인 듯 보였다. 악어 입은 미동도 없었고 진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악어 이빨 하나 누르는데도 아이들의 기질이 고스란히 보였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아무도 걸리지 않았으니 이빨 누르기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동우는 손가락을 악어 입 가까이 갖다 대며 고민하더니 결심했다며 반대쪽 가장자리 이빨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터져 나오는 동우의 환호 속에 영균이가 눈을 감고 또 한 번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까 눌렀던 이빨 바로 옆이 분명 함정일 거라며 그다음 이빨을 눌렀다. 또 생존. 영균이가 기쁨에 겨워 듣도 보도 못한 춤을 췄다. 수민이는 그런 영균이를 한심한 듯 바라보며 무심하게 하나를 삑 눌렀다.
“오, 또 살아남았네!”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이거 고장 난 거 아녜요?” 아이들이 의심 어린 눈으로 악어를 흘겨보며 한 마디씩 던졌다.
진우는 앞서 일곱 번 모두가 행운이었으니 이제 자신의 운은 다했다며 ‘어느 것을 할까요? 하나님한테 물어봅시다’ 주문을 걸었다. 모두의 관심 속 하나를 막 누르려는 찰나!
“자, 수업 마쳤다. 진우, 어머니 1층에서 기다리시겠다. 얘들아, 굿바이!”
아이들은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분명 약속된 시간 내에 게임을 하기로 했는데 순서를 정하다 40분이 다 가버렸다. 다음이라는 타협은 없다는 걸 알았을까. 아이들은 축 늘어진 어깨로 가방을 들고 힘없이 학원 문을 나섰다. 야심 차게 획득한 게임데이가 완벽하고 야무진 야욕에 쓸데없이 순서만 정하다 수포로 돌아갔다.
'준비만 완벽주의자들, 기가 차는구나.' 아이들이 모두 나간 후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서랍에서 그동안 미뤄 둔 월말 정산서류를 큰 마음먹고 꺼냈다. 뭔가 찝찝했다. 그래, 주변이 깔끔해야 일도 잘 되는 법. 걸레를 빨아 책상을 닦고, 마른 수건으로 노트북을 정성 들여 닦았다. 연필 깎기에 뭉툭한 연필을 하나씩 꽂아 뾰족하게 깎고 필통 속 몽당연필을 모두 휴지통에 버렸다. 책상을 정리하다 보니 책장과 선반에 쌓인 뽀얀 먼지가 보였다. 책을 꺼내 물걸레로 닦다 보니 갑자기 밀려드는 피곤함과 허기가 느껴졌다. '다음에 할까?'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서류들이 책상 위에 고이 펼쳐져 있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저만치 떨어진 책상 위에 엎드려 씩 웃고 있었다.
*그날 저녁 괜히 미안해진 저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기능을 빌어 상처 입었을 아이들의 마음에 후시딘을 듬뿍 발라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