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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셔니스타 Jan 03. 2024

한밤의 추격전

이렇게 쫓아올 줄은 미처 몰랐지?

초등 S클래스 사총사 동우, 영균, 진우, 수민이는 정말 끈끈한 친구 사이다. 친해서 끈끈하다기보다는 지겹게 다투다 끈끈해졌다고 해야겠다. 만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아웅다웅, 말 한마디 지지 않는다. 지난 시간 감기로 결석한 진우가 오늘은 학원에 나타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편을 나눠 수많은 억측을 하느라 쉬는 시간 10분이 금세 흘러갔다. 다행히 수업이 막 시작되었을 때 감기가 나은 진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진우가 올 거라고 예상한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반면 그날도 아파서 못 올 거라고 예상한 아이는 탄식을 하며 진우를 맞이했다.

“이놈들아! 그게 뭣이 중헌디! 스피킹 테스트나 빨리 시작해! “

여전히 손짓발짓 알 수 없는 수신호를 주고받는 것을 보며 진우는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 앉으며 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총사는 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찬반으로 나뉘어 목청 높이며 피 튀기는 토론을 했다. 하도 핏대를 올리는 통에 겨우 네 명이 모여 있어도 기초반 아홉 명이 공부하는 반보다 더 시끄럽다. 하지만 경험상 지금은 저렇게 내 혼을 쏙 빼놓던 아이들도 사춘기란 놈이 찾아오면 말수가 줄어들다 끝내 대답조차 귀찮아하는 경지까지 다다른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즈음이면 오늘의 이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이 얼마나 그리울지 알기에 조금이라도 더 눈과 귀에 담아놓고 싶어서 나는 이들의 지랄 발랄 부르스를 귀엽게 보아 넘긴다.

아이들의 미소는 심장을 녹인다. 출처 unsplash

늘 그렇듯 그날도 수업 마치고 늑장 부리며 학원 문을 나서지 않는 사총사들. 다른 반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면 서로 먼저 탈출하려고 북새통을 이루는데 이놈들은 늘 이렇게 꾸물댄다. 또 뭔가 작당을 꾸밀 모양이다. 다음 클래스 시작까지 20분. 한창 배고플 시간이라 아이들이 빨리 자리를 비워줘야 저녁으로 빵이나 단백질 셰이크 같은 걸로 한 끼를 때울 텐데. 마친 지 5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이들은 나갈 생각을 않는다.

중등부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에 아래층 뚜레쥬르에 내려가 빵이라도 하나 사 올 생각에 별생각 없이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를 갈아 신으며 카운트 다운을 했다.


“10, 9, 8, 7... “ 숫자를 거꾸로 셀뿐인데도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이들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갑자기 손놀림이 분주해지며 가방 안에 수업자료며 필통이며 스티커를 마구 쑤셔 넣었다. “6, 5, 4, 서둘러라.” 한 놈이 총알처럼 교실을 가로질러 가더니 빠르게 문을 탁 닫고 나갔다. 그 사이 나는 셋을 세고 있었다. 다음으로 뜀박질이 빠른 두 놈이 뒤따라 ‘타다닥’ 뛰어나갔다. 남은 건 영균이 뿐이었다. “균아... 2. “ 도인 흉내를 내며 여유롭게 책을 챙기던 영균이가 위기감을 느끼며 가방 안에 휴대폰을 던져 넣고 달려가 문고리를 당겼다. 그런데 먼저 나간 세 놈이 밖에서 창문 너머로 눈 여섯 개만 내놓은 채 문을 못 열도록 꼬옥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영균이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영균, 선생님 운동화 다 신었다. 1.” 마지막 숫자를 세고는 꺾어 신었던 운동화를 펴서 신었다. 교실 우측 편 내 책상에서 영균이가 엉거주춤 문을 잡고 서 있는 곳으로 ”파바박 “ 뛰어가니 혼비백산한 장난꾸러기는 나를 피해 교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슬쩍 문쪽을 보니 아직 내가 운동화를 갈아 신은 줄 모르는 세 놈이 완전히 방심한 채 영균이를 가리키며 깔깔 웃고 있었다. “요놈들!!!” 하며 문 손잡이를 당기니 세 아이들은 “으악!” 고함을 지르며 복도로 도망갔다. 뒤늦게 교실을 빠져나온 영균이가 계단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몇 초간 기다렸다. 그렇게 결집한 사총사는 숨을 헐떡이며 계단 아래에서 내가 따라오나 안 오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냥 들어가려다 운동화 신은 김에 오랜만에 아이들 뒤를 달려 나갔다. 아이들은 학원 건물을 벗어나 주차장을 지나 인도 위를 달렸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한밤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요즘 살짝 게으름은 피웠지만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체력이 좋아진 걸까. 아니면 아이들이 너무 웃느라 힘껏 달리지를 못한 걸까. 터질듯한 숨을 고르며 뛰다 걷다 3분가량 쫓아갔더니 내 끈기와 체력을 과소평가하고 잠시 쉬고 있던 영균이 한 놈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깔깔대다 헉헉대다 줄행랑치던 아이들은 영균이가 붙잡힌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막상 붙잡고 보니 뭘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뻘쭘하던 그 순간, 나는 다시 위엄을 갖췄다. 영균이의 두 뺨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한껏 당겨 늘리며 멀찌감치 서 있던  다른 아이들과도 다음 시간에 보자며 인사했다. 뒤돌아오는 길 갑자기 뛰느라 놀란 허벅지를 주무르며 학원으로 돌아왔다. 코와 뺨이 시리고 여전히 숨이 찼다. 아이들은 추격전이 더 지속될까 하는 기대감에 한동안 내 뒤를 졸졸 따라오다 제각각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한밤의 추격전 후에도 초등 S클래스 아이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웅다웅 다툰다. 목소리를 드높이며 서로가 서로를 어이없어한다. 수업을 마치면 꾸물대며 귀가 준비를 한다. 가끔 오늘도 추격전 하냐고 사랑스럽게 물어온다. 하지만 수업 시간엔 더 집중해서 공부하고 학원 오는 시간이 더 즐겁다고 한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운동한다.



*한밤의 추격전은 절대 의도된 사건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다. 아이들의 안전을 최대한 고려해 위험한 곳으론 몰아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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