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겨울

by 엘리

사흘째였어요.

엘리는 티하우스 구석 긴 의자에 웅크린 채
계속 잠들어 있었어요.


피코는 걱정스럽게 그녀 곁을 맴돌았어요.
가끔 코로 그녀의 손을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작은 소리로 끙끙거리며 깨우려 해보기도 했지만
엘리는 눈을 뜨지 않았어요.


스위피는 창문 너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고,
Mr. GreenHand도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어요.

정원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어요.


엘리는 깊은 잠 속에서도
가끔 미간을 찌푸리거나
작게 신음을 내기도 했어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듯이요.


나흘째 밤.

엘리가 드디어 눈을 떴어요.

칠흑같이 어두웠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팔목에서만
구릿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죠.

그런데 팔찌가 스르르 풀리기 시작하더니

구릿빛 뱀의 모습으로 변신했어요.

쉬쉬였어요.


쉬쉬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어둠을 가르며
티하우스 전체를 밝혔죠.

쉬쉬는 엘리의 다리 주변을
꼬리로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어요.

따라오라는 뜻인 것 같았어요.


엘리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이제는 분간조차 되지 않았어요.

모든 경계가 흐릿했어요.

온통 어둠뿐인 세상에서
오직 구릿빛 불빛만이
길을 비춰주고 있었어요.


엘리는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어요.

발걸음은 자동적이었고,
의식은 어딘가 멀리 떠 있는 것 같았어요.


구릿빛이 이끄는 대로,
그저 그 뒤를 따라갔어요.

피코가 언제부터인지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지만
엘리는 그것조차 희미했어요.

어디선가

요요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것도 꿈속 같았어요.

"괜찮아, 엘리."


엘리는 그저
구릿빛을 따라 걸었어요.


그리고 도착한 곳은
지하통로였어요.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어요.

돌로 만들어진 좁은 통로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어요.

쉬쉬의 빛만이
그들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었죠.


피코는 바들바들 떨며
엘리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어요.

"무서워..."

엘리는 피코를 안아 들었어요.

"나도 무서워. 하지만 같이 있잖아."


한참을 걸어가니
통로 끝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쉬쉬가 천천히 몸을 말기 시작했어요.

동그랗게, 동그랗게.

완벽한 원을 그리며.


그 구릿빛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반짝이는 거울의 형상이 되었어요.


엘리는 미동도 없이
그 신비로운 변화를 바라보았어요.

거울 표면이 잔잔히 빛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어요.

한 여인이었어요.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굴.
왕관을 쓰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이었죠.


엘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요.

"당신은... 누구예요?"

거울 속 왕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리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나는 너지."

"그럴 리 없어요."

엘리는 고개를 저었어요.

왕비는 낮게, 섬뜩하게 웃었어요.

"과연 그럴까? 하하하하하..."


왕비의 웃음과 함께
거울 속에서 장면들이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했어요.


"마이클은... 왕으로서 부족합니다."

"그의 결정들을 보십시오. 너무 감정적이고 일관성이 없어요."
"나라가 위험합니다, 폐하."

왕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마이클이 중요한 회의에서 발언을 해도
신하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어요.

왕비가 없는 자리에서는
더욱 노골적이었죠.


"내일 결투가 있을 예정입니다."

"상대방은 이미 준비를 마쳤고..."

"마이클은 모르겠죠?"

왕비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엘리는 그 모든 장면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왜... 왜 그렇게 했어요?"


왕비가 거울 너머에서 대답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야.
완벽하지 않으면 다 무너져.

하지만 마이클은... 마이클은 너무 약했어.

그대로 두면 나라도, 우리도 다 망하는 거였어."


엘리의 목소리가 떨렸어요.

"그래서... 배신을?"


왕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어요.

"배신이 아니야. 선택이었어.
가장 현실적인 선택."

나는 완벽해야 했어.
실수할 여유가 없었거든.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엘리는 무릎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그럼... 마이클도 나고,
그런 선택을 한 당신도... 나라는 거네요..."

왕비가 당황하며 말했어요.

"무슨 소리야? 마이클이 너라고?"


그때 어디선가
요요가 나타났어요.

"맞아. 마이클도 엘리고,
왕비인 너도 엘리야.
모두 같은 사람의 다른 면들이지."

왕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어요.

"그럴 리가... 내가 어떻게..."


요요가 조용히 말했어요.

"넌 너를 배신한 거야.

네가 너를 외롭게 만들고,
네가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거지."

엘리가 절망하며 소리쳤어요.

"안 돼... 안 돼!!!"


왕비는 차갑게 대답했어요.

"말도 안 돼. 나는 올바른 선택을 했어.
약한 건 마이클이었고..."


엘리가 절규했어요.

"내가 나를... 내가 나를 죽였어!!!"

엘리의 절규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어요.


쨍그랑!


거울이 산산조각 났어요.

깨진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지며
각각 다른 엘리의 모습들을
반짝이다가 사라졌어요.


순수한 버섯집 소녀,
외로운 호텔 지배인,
차가운 왕비...

모든 조각들이
빛을 잃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요.


쉬쉬는 다시 작은 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몸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어요.


그 순간.

지하통로에서 시작된 차가운 기운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어요.

정원으로, 정원으로.


티하우스 창문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고,
모든 꽃들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차가운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고,
정원의 모든 색깔이
회색빛으로 변해갔어요.

스위피와 민들레 씨앗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고,
Mr. GreenHand도 손을 움츠렸어요.


완전한 정적.
완전한 침묵.

바람도 멈추고,
새소리도 사라졌어요.

피코는 떨리는 몸으로
엘리에게 바싹 붙었어요.


엘리는 깨진 거울 조각들 사이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어요.

눈물도 나오지 않았어요.
"내가... 내가 나를 배신했어..."

그녀의 작은 속삭임만이
얼어붙은 정원에
홀로 울려 퍼졌어요.


정원은 이제

완전히 겨울이 되었어요.

엘리가 만들어낸
차가운 절망의 겨울이었어요.




EP.12 정원 끝, 작은 대화


피코: (떨리며) "엘리... 너무 추워..."

엘리: (무표정하게) "미안해. 내가... 차가운 사람이었나 봐."

피코: "아니야. 넌 따뜻해."

엘리: "증거가 있어? 내가 나를 배신했는데?"

피코: "지금 내가 네 곁에 있잖아. 그게 증거야."

12화 삽화.png 정원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