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와 에이든

by 엘리

뿌연 연기 속에서

첫 번째 형체가 또렷해지기 시작했어요.


검은 연기에서 나타난 건

날카로운 눈빛을 한 소녀였어요.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났고,

입가엔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어요.


"드디어 만났네."

그 소녀가 엘리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오랫동안 우리를 숨겨왔던 너를."


그리고 반대편

하얀 연기에서도 또 하나의 형체가 고개를 들었어요.

고개를 숙인 채 움츠린 소녀.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고,

하얀 드레스는 구겨져 있었어요.

손을 꼭 쥔 채 몸을 더 웅크렸어요.


"안녕?"

그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검은 소녀가 비웃듯 말했어요.

“나는 에이든이야. 너를 늘 지켜보는 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엘리를 찌르듯 바라봤어요.

“맨날 우물쭈물,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니?

그래서 내가 너무 피곤하잖아.

너 같은 애는… 실수하면 끝장이야.”


하얀 소녀는 부끄럽다는 듯 눈을 깔며 말했어요.

“나는 루나라고 해. 미안해… 내가 잘 못해서…

그냥… 내가 없었으면 나았을 텐데…”


에이든이 날을 세운 말투로 쏘아붙였어요.

“정말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더 노력해야지.

도움도 안 되면서 왜 그렇게 울먹 거리기만 해?”


그 순간, 루나가 움찔했어요.

오랫동안 삼켜온 말들이

텁텁한 숨결을 타고 터져 나왔어요.


“나도… 나도 잘하고 싶었어! 그런데…”


“틀릴까 봐 말도 못 하고 있으면,

‘왜 이렇게 눈치만 보냐’고 하고…


겨우 용기 내서 말하면

‘그건 도움이 안 된다’고 했잖아…


조금 느리면 ‘답답하다’고,

눈물 보이면 ‘감정적으로 굴지 말라’고…


내가 뭘 해도,

사람들은 날 이상한 애처럼 봤어.”


루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점점 목소리를 높여갔어요.


“그럴 때마다 난 더 조용해졌고…

더 작아졌고…

이렇게 내가 없어지나 보다 했어."


루나는 목이 메어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간신히 말을 이어갔어요.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고

누가 한 번만 말해줬으면 했어…”


그 말이 끝나자,

지하통로엔 잠깐의 정적이 흘렀어요.


그러다 에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봤어요.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지

노력을 해야 하는 거야."


에이든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왔어요.

그녀의 주위로 검은 연기가 일렁였어요.


"나는... 얘가 다치지 않게 하려고

늘 앞장섰어."


에이든은 턱짓으로 엘리를 가리켰어요.


"사랑받으려면,

쓸모 있어야 되니까.

나는 그걸 알려줬던 것뿐이야."


피코가 낮게 으르렁거렸어요.

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에이든의 말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어요.

그건… 오래전부터

자신이 자신에게 해왔던 말이었거든요.


그 순간, 검은 소녀의 몸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고,

하얀 소녀의 몸에서는 서리가 번졌어요.


둘의 힘이 부딪치자 지하통로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어요.

돌덩이들이 천장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벽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어요.


"그만해!"

엘리가 외쳤어요.

하지만 에이든과 루나는 멈추지 않았어요.


"피코, 위험해!" 엘리가 피코를 안아 들었지만,

피할 곳은 없었어요.


바로 그때, 지상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정원의 얼음은 더욱 두껍게 자라났고,

티하우스 유리창엔 서리가 자욱하게 번져갔어요.


정원 가장자리에 있던 나무들이

검게 그을더니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어요

Mr.GreenHand의 초록 손끝에도

검은 그을음이 번져갔어요.


스위피와 민들레 씨앗들은

얼음과 불꽃 사이, 양쪽에서 휘몰아쳐 날렸고,

정원의 공기는

차갑고도 뜨겁게, 동시에 뒤틀리고 있었어요.


요요는 안개처럼 흐릿해져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어요.


"엘리..."

요요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희미하게 들렸어요.

"정원이... 무너지고 있어..."


지하에서 에이든과 루나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져 갔어요.


"넌 완벽해야 해!" 에이든이 소리쳤어요.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사람들이 널 버릴 거야!"


"어차피 난 아무것도 못해!"

루나가 절망하며 말했어요.

"도우려고 해도 오히려 폐만 끼치고...

나 같은 건 없어도 돼!"


둘의 대립이 폭발할 때마다

지하통로와 정원이 동시에 흔들렸어요.


엘리는 깨달았어요.

이대로 가면 정원뿐만 아니라

모든 게 무너져버릴 거라는 걸.

피코도, 스위피도, Mr. GreenHand도, 그리고 자신조차...


"제발..."

엘리가 울부짖었어요

"제발... 그만해 줘..."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둘의 격한 대립 속에서 묻혀 들리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