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내가 함께 있을게
지하통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어요.
루나와 에이든의 대립이 폭발하며
돌덩이들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렸고,
벽에는 거대한 균열이 번져갔어요.
“안 돼… 안 돼!”
엘리가 비명을 질렀어요.
“더 이상 못 보겠어. 난 못해!”
엘리는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엘리의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에이든의 검은 불꽃과 루나의 하얀 서리가
서로를 집어삼키려 했고,
그 충격파가 지하통로 전체를 뒤흔들었어요.
엘리는 떨리는 손으로 팔목의 쉬쉬를 만지작거렸어요.
구릿빛 뱀이 스르르 나타나 그녀를 바라봤어요.
“쉬쉬… 제발…”
엘리가 애원했어요.
“다른 곳으로 보내줘. 어디든 좋아.
여기서 나가고 싶어!”
쉬쉬의 눈이 반짝였고,
공간을 가르는 포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때.
“엘리, 멈춰.”
엘리는 깜짝 놀라 돌아봤어요.
피코가 포털 앞을 막아서고 있었어요.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 본 적 없을 만큼
진지하고 단호했어요.
“피코…?”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가 말할 차례야.”
피코는 한 걸음씩 엘리에게 다가왔어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삼켜온
간절함이 담겨 있었어요.
“난 네가 제라늄일 때도, 마이클일 때도
늘 네 곁에 있었어.”
엘리의 눈이 커졌어요.
“근데 그땐, 나는 그냥 화초였고 말이었어.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어.
그저… 네가 힘들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어.”
피코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어요.
그의 눈이 젖어 있었어요.
“제라늄이 호텔 방에서 혼자 울 때도,
마이클이 성에서 고뇌할 때도,
난 거기 있었어.
단 한 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어.”
엘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어요.
“그래서 이번엔 개로 태어났어.”
피코가 한 걸음 다가왔어요.
“네 곁에서, 네 눈높이에서,
함께 숨 쉬고, 함께 울고 싶어서.
이번에는… 정말, 너를 돕고 싶었어.”
뒤에서 루나와 에이든의 대립이
더욱 격렬해졌어요.
지하통로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피코는 멈추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도망치지 마. 제발.”
피코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났어요.
“네가 도망치면 또 혼자가 되는 거야.
제라늄도, 마이클도, 또다시…
난 더 이상 네가 혼자 있는 걸
볼 수 없어.”
그 순간, 쉬쉬의 포털이 더 크게 열렸어요.
탈출구가 코앞에 있었어요.
하지만 엘리는 움직이지 않았어요.
피코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넌 충분히 강해. 이미 여기까지 왔잖아.”
피코가 조용히 말했어요.
“이제 마지막이야. 끝까지 가보자.
이번에는 내가 함께 있을게.”
엘리의 입술이 떨렸어요.
“무서워…”
그녀가 작게 속삭였어요.
“나도 무서워.”
피코가 대답했어요.
“하지만 우리 둘이잖아.”
그 순간, 뒤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어요.
루나와 에이든의 힘이 절정에 달한 거였어요.
엘리는 포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피코를 보았어요.
“넌… 정말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구나.”
엘리의 목소리가 따뜻해졌어요.
“고마워, 피코.”
피코가 꼬리를 살짝 흔들었어요.
엘리는 쉬쉬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미안해, 쉬쉬. 조금 더 있을게.”
쉬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포털을 천천히 닫기 시작했어요.
엘리는 피코와 함께
루나와 에이든이 있는 곳으로 돌아섰어요.
“도망치지 않을게.”
엘리가 두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너희도 나니까. 다 나니까.”
피코가 그녀 옆에 바짝 붙어 섰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함께였어요.
루나와 에이든의 대립이 잠시 멈췄어요.
처음으로 엘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거든요.
“난… 너희가 왜 생겨났는지 알 것 같아.”
엘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너희 둘 다… 내 안에 같은 상처에서 태어났구나.”
루나가 깜짝 놀라며 에이든을 바라봤어요.
에이든도 처음으로 루나를 제대로 쳐다봤어요.
“같은… 상처에서?”
루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어요.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어요.
“응.”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너희는 둘 다 사랑받지 못했던 나에게서 나왔어.
루나는 그 상처 그 자체가 되었고,
에이든은 그 상처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야.”
엘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그리고 문득 깨달았어요.
"그런데... 정말 나는 사랑받지 못했던 걸까?
“넌 날 지키려 했고, 넌 날 대신 아파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난 그저 나로서 존재할 거야.
사랑받지 못한 내가 아니라,
원래부터 사랑받아온 나로.”
그 순간, 에이든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어요.
그토록 강하게만 있으려 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어요.
루나도 조용히 눈물을 흘렸어요.
오래도록 혼자 품고 있던 슬픔이
마침내 터져 나왔어요.
두 소녀가 복받쳐 울기 시작했어요.
에이든은 과도하게 방어하며 살아온 피로를,
루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슬픔을
한꺼번에 쏟아 냈어요.
그러다 루나가 살며시 에이든에게 다가갔어요.
에이든도 더 이상 밀어내지 않았어요.
두 소녀가 서로를 꼭 껴안았어요.
말없이, 그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그 순간,
검은 연기와 하얀 연기가 서로 섞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부드러운 빛으로 승화되어
조용히 하늘로 흩어져 갔어요.
그건 마치.
더 이상 품고 있을 필요 없는 고통의 파동이
사랑의 진동 속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순간처럼.
그 순간, 엘리 주머니 속 유리병에서
작은 음표가 기쁘게 춤추기 시작했어요.
지하통로 전체에 따뜻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어요.
차갑던 돌벽이 온기를 되찾고,
축축했던 공기가 부드러워졌어요.
지하통로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어요.
깨진 거울 조각들이 바닥에서 일어나
공중에서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완성된 거울 속에는
루나도, 에이든도, 제라늄도, 마이클도, 왕비도 아닌
그냥… 엘리가 있었어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엘리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거울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어요.
엘리는 피코를 안아 들어
자신의 얼굴 옆에 나란히 두었어요.
거울 속에는 엘리와 피코의 모습이 함께 비쳤어요.
피코가 그녀의 얼굴에 코를 비비며 말했어요.
“이제… 정말 함께야.”
엘리가 피코의 볼에 뽀뽀를 하며 속삭였어요.
“응. 이번에는 정말로.”
엘리와 피코가 지하통로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자,
정원의 모든 것들이 그들을 맞이했어요.
그 순간, 지상의 정원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어요.
얼어붙었던 꽃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타버린 나무들에서 새싹이 돋아났어요.
Mr. GreenHand는 처음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어요.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히 움직이던 그가
처음으로 당당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어요.
스위피는 기쁨에 겨워 공중제비를 돌며
새로운 민들레 씨앗들을 곳곳에 심었어요.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이에요.
정원은 더 이상 폐허가 아니었어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아름다운
진짜 정원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 정원 한가운데서
엘리는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상태를
세상과 나누고 싶었던 거야.”
요요가 티하우스 지붕 위에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이제 진짜 너를 만날 준비가 됐구나.”
엘리는 피코를 품에 안고
정원을 천천히 걸었어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어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어요.
정원의 모든 존재들이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어요.
그리고 멀리서 새로운 아침이
조용히 밝아오고 있었어요.
EP.15 정원 끝, 작은 대화
피코: "이번에는 정말 함께야."
엘리: "응. 무서워도... 함께니까."
요요(어디선가): "용기란, 무서움이 없는 게 아니라... 무서워도 가는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