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우리집 사이에 있어 자주 가게 된 잠실ㅡ돌아다니다가 롯데뮤지엄에서 LA 출신 작가 알렉스 프레거의 사진전 《빅 웨스트》가 열린다는 광고 포스터는 많이 보았지만 전형적인 헐리우드 사진 작가인 줄 알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영화 《스펜서》와 묶은 통합 관람권이 저렴하게 나와 둘을 차례로 보게 되었다.
스펜서는 다들 알겠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결혼 전 성이다. 영화는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후 그걸 묵인하는 왕실에 반발하며 가족에게 이미 찍힌 다이애나가 샌드리엄성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휴가 3일을 그린다. 휴가라기엔 너무 숨막히는... 쓸데없이 오래되고 넓은 성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잘 먹고 잘 쉬었다는 증거로 몸무게를 찌워나가야 한다며 오자마자 체중계에 올라가기를 요구하는 전통은 웃기지 않는 상사의 농담 같고, 취향이나 기분과는 상관 없이 매일 참석해야 하는 행사와 입어야 하는 옷이 정해져있고, 사람들은 그녀가 마네킹처럼 그걸 예쁘게 차려 입고 있기만을 바랄 뿐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 하나 없다. 다이애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대한 사람에게는 3일이라는 기간 동안 한 여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쫓는 이 영화가 정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히스테리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다이애나의 상황과 감정이 잘 그려졌다. 특히 신경을 긁는 듯한 음악이 인상 깊었는데, 그런 음악이 멈추는 순간이 있었다. 파파라치를 핑계로 창을 못열게 하고 커튼을 꿰매놓은 것을 다이애나가 확 제꼈을 때다. 실이 뜯어지는 순간 해방감이 들지만 그 뒤에는 진공만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빅 웨스트》에도 화려한 화장과 복장을 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헐리우드의 화려함 뒤에 숨은 공허함이라는 전형적인 주제로, 그러나 여성을 다시 대상화할 뿐인 그저그런 사진인가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진 작가 알렉스 프레거는 1979년생, 사진 속 모델들은 1950년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철저히 연출된 사진이었던 것이다. 특히 군중 연작을 보면 수십 명의 모델/배우들을 캐스팅하고 분장해 디렉팅한 대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스틸컷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프레거는 "움직이는 사진"이라고 부르며 영화 작업도 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 중 두 편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영화 산업과 놀이동산의 도시 LA에서 마주친 두 남녀가 서로의 시선 안에서 환상 속 인물이 되어가는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무대 위 발레리나가 관객이 시선을 의식하는 내용이었다. 관객과 대중이 더 이상 관객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알렉스 프레거는 우리 모두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라고 한다.
영국이나 왕실을 유지하는 나라를 볼 때마다 21세기에 왕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 때부터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특권을 누린다는 게 현대의 평등 사상에 위배되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왕실은 그 특정 가족의 존속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국가를 민족이라는, 위대한 과거라는 환상으로 묶어주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부와 혜택은 개인으로서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재로서 볼거리를 제공할 의무로서 내려지는 것이다.
어쩌면 왕실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그걸 알고 순응했고, 다이애나는 거길 나와서 한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과 미디어는 다이애나의 죽음에까지도, 죽음 이후에도 이미지를 덧입히고 소비한다. 파파라치에 쫓기다 삶을 마감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환상의 허구를 깨트리고 카메라를 대중으로 돌린 사진작가의 전시를 함께 본 것이 흥미로웠다.
서로를 서로의 시선 안에서 속박하고 소비하는 우리들. 조금 더 주체적으로 살려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게 하는 영화와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