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처음 마주친 그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의 순례길이 종종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 한국인이 반갑다는 이유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천근만근으로 무거운 눈을 억지로 뜨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우리는 인연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저 무감각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한 순례자로 남아 금방 제 기억에서 기화되어 날아가진 않았을까요. 가끔 우리의 인연이 닿지 않은 평행세계를 생각합니다. 아직도 저는 제가 사랑한 것이 당신인지 낭만인지 궁금합니다.
우연한 첫 만남 이후에도 우리는 여러 번 길 위에서 마주치곤 했습니다. 만남이 당연하고 헤어짐이 익숙한 순례길 위라 놀라움은 없었습니다. 원체 사람을 좋아하고 또 혼자 유일히 있는 사람을 더 궁금해하는 성격인지라 당신과 만날 때마다 활기찬 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만, 당신은 비언어적인 모든 행동을 통해서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총 네 번을 마주치는 동안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런 입장을 고수하는 당신을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의 욕심으로 타인의 시간을 방해하는 건 안될 일이니까요. 그렇게 마음먹고 우연히 마주친 마지막 순간, 이번에는 처음으로 당신이 먼저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제까지 거부당했다는 생각에 살짝 빈정이 상해있던 저는 당신이 먼저 말을 걸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모든 속상함을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비록 당신이 말을 건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제가 한국인이기에 함께 한식을 만들어먹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선택한 행동이었다 하더라도요. 제가 그려온 일정 상 당신의 계획은 무너졌지만 당신은 나와 함께 길을 걷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비계획적인 동행은 시작됐습니다.
말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던 당신은 생각보다 말이 많았고 무뚝뚝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당신은 예상보다 장난기가 진하게 배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어느새 3주 차가 되어 가벼운 지루함을 마음 한 구석에 안고 있었는데 당신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빛나는 눈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처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답지 않게 이야기는 쉽게 끊이지 않았고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붕붕 뜨는 장난 섞인 말들은 땅에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아닌 목의 통증이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샤워를 한 뒤 정원에 나란히 앉아 당신의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낭만이라는 단어가 절로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찾아 헤매왔던 낭만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던 걸까요.
당신과 제게는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그 누구와의 동행보다 시간을 같이 쓰는 때가 많았습니다. 아침엔 함께 걷고 낮엔 함께 쓰고 저녁엔 함께 기타를 치고 대화를 하는 일상을 가지는 동안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풍족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당신과 함께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루하루는 색달랐고 다채로웠습니다. 우리는 일부러 맞춰서 다니지는 않았으나 동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뒤 당신이 묵직하게 털어놓은 순례길에 오른 이유를 듣고 우리는 결국 헤어졌습니다. 헤어짐에 익숙한 곳인데, 나는 하루 만에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그건 저만의 생각이 아니었나 봅니다. 우리는 다음날 우연히 길 위에서 다시 만났고 결국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그 너머 서쪽 땅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 당신이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일상을 보내고 있는 도시에도 함께 갔습니다. 하루 앞도 몰랐던 동행은 그렇게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제가 당신을 쫓아다닌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양 빠지는 변명을 하자면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이 정도로 즐거움과 유쾌함을 주면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번에 찾은 낭만은 당신이라는 생각에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정도 한 몫했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발을 떼어내던 순간부터 당신과 나는 차츰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변한 건지 당신이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간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 같은 행동과 말들이었을 텐데 제가 느낀 감정은 지루함과 혼나는 듯한 불편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순례길에서와는 달리 그곳에서는 달리 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던 걸까요....
말풍선이 끊이지 않아 까무룩 잠들 때까지 쉴 수 없던 우리는 여전히 많은 대화를 했지만 가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고 저는 바쁜 당신의 눈치를 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런 이유들과 더불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역마의 삶을 사는 저는 단숨에 모로코로 날아갔습니다. 모로코와 다른 유럽의 도시들, 그리고 미국에 머무는 세 달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우린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갔습니다만 언젠가부터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지 못한 우리의 연락은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제는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게 됐고 기억에서만 존재하는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그게 속상해 슬퍼하던 시간이 꽤나 길었습니다. 당신이 이번에 제가 드디어 찾아낸 낭만이라는 생각에 당신을 잃으면 나의 낭만도 사라질 것만 같아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그 하중을 더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간 인연인 걸 알면서도 나의 낭만을 붙잡고자 당신을 기억하는 걸 멈출 수 없었습니다.
괴로운 시간이 지속되면서 더 이상 이 감정에만 파묻혀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저의 모든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가다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실제로 그때 그 순간에 낭만이 있었지만 당신이 낭만인 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그 가치는 사실 제가 부여한 것이었고 그 본질은 제게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와 풍경을 그려온 건 저였고 행동한 것 또한 저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당신을 잃었다 해서 낭만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고 결국 낭만은 여전히 제 안에서 또 다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당신에 대한 기억은 한 때의 추억으로 차츰 변해갔습니다. 그래도 아직 저는 헷갈립니다. 저는 그때, 당신을 사랑했던 걸까요 아니면 저의 낭만을 사랑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