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2
그 시절 난 사랑이 시시했다.
내 청춘엔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그 시절 난 이 되도 않는 개소리를 정성껏도 받들었더랬다.
이 내 믿음이 얼마나 맹랑하며 깜찍한 오만이었는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언제나 그러하듯 깨달음이란 녀석은 한 사건이, 한 사랑이, 한 사람이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명멸한 뒤에야 비로소 그 민낯을 보여주니까.
더 이상 어떻게 손쓸 틈도 없는 그 틈을 타. 빌어먹을.
H를 처음 만난 건 고교 1학년 때 내가 속해 있던 역사 토론 동아리에서였다.
내 비루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그날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토요일 오후, 동아리 정모가 있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못 보던 얼굴이 앉아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 위였던 H는 토론 참관 후 동아리 가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꽤나 거만한 조건을 내건 무례한 참관자였다.
그러나 그날 주제 발제자였던 나는 내 코가 석자인 관계로 가입 여부 불투명한 신규 회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은근 이 신경 거슬리는 H를 그저 자의식 과잉의 불쌍한 사춘기 소년이겠거니 하고 넘기기기로 했다.
그런데 마음과 달리 그날 모임 내내 나는 이 수상한 참관자가 퍽 신경 쓰였던 듯하다.
팔짱을 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토론을 지켜보고 있던 H가 간혹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를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짓던 알듯 말듯한 미소가 내내 거슬렸던 걸 보면. 그리고 그 사소한 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이후 공식적으로 동아리에 가입한 H는 첫 만남부터 감지했을 내 못마땅한 눈초리 때문이었는지 토론 때마다 사사건건 내 발언의 꼬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 H에게 왜 그랬는지 사실 여부를 물어본 적이 없어 여전히 확인 불가하다)
이에 질세라 나 역시 그때마다 따박따박 매서운 반박을 퍼부으며 살벌하게 날을 세웠다.
덕분에 그와의 토론(혹은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정모가 있는 주말이면 나는 밤새 미친 듯이 토론 준비를 해야 했고 H의 사정 역시 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 피 말리는 전쟁 끝 남은 것은 H와 나 모두 대학에서 같은 전공을 선택했다는 정도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야간자율학습을 앞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저녁 식사 시간, H의 친구라는 자가 교실로 찾아와 H가 운동장 벤치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뭐 이런 생뚱맞은 전갈이 다 있는가.
가뜩이나 우연히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불편한 게 당시 H와 나의 현실일진대 개인 면담이라니.
게다가 직접 와도 될 일에 전령까지 대동하다니.
도무지 이 뜬금없는 미팅의 아젠다를 짐작할 길 없어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던 듯도 하다.
그래도 동아리 선배의 호출이니 거절할 수도 없어 카디건을 걸쳐 입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최대한 느릿느릿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웬걸, H는 그날 나에게 느닷없이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 왔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런데 그 밤 그토록 나를 기함시켰던 H의 정확한 워딩은 떠오르질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건 비단 그의 고백 워딩만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그날 밤 그와의 그 ‘미팅’에 대한 기억은 비디오는 물론 그 어떤 오디오도 남아 있질 않다.
H가 친구를 시켜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냈다는 것도, 그가 고백을 했다는 것도, 그날이 가을밤이었다는 것도 모두 그의 편지를 통해서 간신하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다.
그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 난데없는 고백까지 물리적으로 존재했을 몇 달간의 서사에 대한 이렇다 할 기억이 나에겐 없다. 토론 때마다 피 터지게 싸웠다는 것 말고는.
그의 편지에서도 이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순 없었다.
멜로건 로코건 드라마로 치면 이 시기야 말로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일진대 왜 내 기억에서 이 부분이 삭제된 건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아마도 내 전전두엽 어딘가에서 감정신호를 해석하는 신경 회로가 고장 난 탓일지도.
어쩌면 사랑의 기승전결에 있어 애당초 ‘승’과 ‘전’은 존재치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던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그 소녀 혹은 그 소년은
하필 당신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황홀한 미소 흩날리며 서 있었을 뿐이고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옆모습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으며
당신을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칼데라 호수보다 깊어 헤어 나올 길 없었을 터이고
석양 속을 걷는 모습이 모르포 나비의 날갯짓처럼 눈부시게 고혹적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숨 막히는 몇 초간의 영원 같은 순간을 지나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서사는 수학적 혹은 물리학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왜 그를 혹은 그녀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를 객관적 데이터로 증명할 방도는 없다.
그저 우리가 첫사랑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건 어느 날 벼락 맞은 듯 사랑에 빠졌다가 또 어느 날엔가 장렬하게 결별을 맞았다는 정도가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못내 궁금하다.
나의 기억에 없는 이 시간을 H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그 시절 우리는 매일 오전 7시에 등교해 이름도 하 수상한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밤 11시가 되어서야만 하교가 허락됐다.
덕분에 동아리 정모를 제외하곤 H와 사적으로 만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그와의 유일한 대화 창구는 편지였다.
다행히 둘 다 읽고 쓰길 좋아해 일주일에 두세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던 듯싶다.
H와의 편지 소재는 주로 그 시절 우리의 우상이었던 헤세를 비롯해 헤밍웨이와 톨스토이, 니체, E.H카, 단재 신채호, 황지우, 최승호, 김지하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역사와 철학, 문학이었다.
물론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시달릴 불안감과 열패감, 연민, 자괴감 등이 뒤섞인 음울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러나 기막히게도 H는 그 사이사이 나에 대한 사랑을 아주 적나라하게 혹은 농인 듯, 때론 칼릴 지브란과 헤세의 글을 빌려 눈물겹게 펼쳐 놓았다.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헌사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마침내 결별을 맞았다.
입시가 끝난 그해 12월 어느 늦은 오후,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 이미 반년 전부터 시작된 된 내 오랜 이별 통보에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던 H가 답을 했다.
그가 없는 내 남은 생을 상상할 수 있냐고. 그는 나 없는 삶 따윈 생각해 본 적 없다고.
이토록 눈물겨운 H의 순애보 덕분에 그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반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끝내 이별을 선택했다.
그 시절 난 사랑이 시시하다 믿을 만큼 오만방자했으니까.
그리고 이 무례한 오만함이 무너지기까지는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나 없는 H의 일상이 꽤 위태로울 거라는 지극히 순진했던 내 편견과 오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박살 났다. 다행히.
나와 같은 해 대학에 입학한 H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학교 일문과 여학생을 쫓아다닌다는 풍문으로 나에게 날아왔다.
이 뉴스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지만 하찮은 기억력의 소유자인 내가 지금까지 그 여학생의 전공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그 시절 그 뉴스는 내게 적잖이 충격이었던 듯 싶다.
그가 편지로 다짐했던 “네가 어디에 있든 혹여 언젠가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일생 동안 너 하나만을 사랑하겠다”는 열렬한 맹세는 고작 결별 반년도 안돼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난 것이다.
맞다. 나 없는 그의 일상은 극히 위태로울 것이라는 내 깜찍한 편견과 나 없는 삶 따윈 상상할 수 없다던 그의 섣부른 오만은 그렇게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후 한동안 나는 H의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맹세가 고작 반년도 지켜지지 않은 것에 대해 씁쓸해했으나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시절 H의 맹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알랭 드 보통의 설명처럼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항상 “지금은 사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만 한다. 이 말은 시간에 얽매인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원히 사랑하겠다”고백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즉 영원은 차치하고 다음 주조차 담보할 수 없는 허술한 진술인 셈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다시 빌자면 누군가를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 생을 건 유일한 사랑일진대.
따라서 이 진술은 그 진술 당사자가 사망에 이르지 않은 이상 진실이 아니다. 즉 이 진술은 언제나 거짓이다. 사망자가 말할 리는 만무하니까.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이처럼 필생의 사랑이라는 열렬한 고백을 받는다면 혹은 이토록 위험한 진술을 해야 한다면 그 고백이 어쩔 도리 없이 거짓이라는 모순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열여덟의 내가 H의 그 열렬한 고백을 열렬히 믿었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세상만사에 꽤나 시니컬했던 열여덟 소녀는 어쩌면 당시에도 그 애절한 맹서 따위는 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난 사랑이 몹시도 시시했고 현실은 언제나 사랑보다 빡셌으니까.
다만 H와 함께한 그 시절 내가 누군가의 열렬한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그 감각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H가 언젠가 편지에서 고백했듯 그가 사랑하는 건 나라는 구체적 존재라기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그 감정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아카시아 잔향 아련했던 그 가을밤 운동장 벤치에서
내가 그에게 휘둘린 것일까 아니면 그가 나에게 휘둘린 걸까.
그 후로 오랫동안
아주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흘러 내려왔으나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만 늘어간다
그 부잡한 살림살이 헤집다
너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렀던 내가 떠오르니
이 잉여의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더 이상 나의 시간 속에 머물지 않는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