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글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죽도록 괴로울 때 가장 글이 잘 써진다. 그러다가 아주 약간만이라도 저점을 벗어났다 싶으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끝맺지 못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나 자신도 이상하다. 사적인 글을 쓸 때를 제외하면, 끝내지 않을 일은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고, 시작한 일을 묵혀놓는 건 더더욱 못하는 성격인데.
우울하고 슬플 때, 가장 외롭다. 모두 나만 공격하는 것 같고, 나만 무능해 보인다. 앞에 놓인 문제들을 도무지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이 무겁게 짓누른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 한마디 거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럴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마흔이 넘도록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인생 앞에서 이렇게 주눅 드는지. 코로나 격리 4주 끝에 세상 밖을 다시 나오고 나니, 누구에게도 더 이상 손 내밀기가 무섭다. 그리고 특히, 글을 쓰든 말로 하든, 내 생각을 밖으로 내뱉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어릴 적에 자신감 넘치는 친구들을 언제나 부러워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무시당할까 봐,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봐, 또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거나 따돌림을 당할지 몰라하지 못한 일이 많다. 남을 의식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무얼 하든 나 자신을 옥죄곤 한다. 남들 눈 따위는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딱 필요한 만큼만 남들 눈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센스 좋은 사람들과 달리, 난 평소에 그토록 남들을 의식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해 크게 손해를 보는 아둔함마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과한 자의식이다. 글도 후지고, 삶도 별 볼 일 없는데, 무얼 그리 내세울 것이 있다고 글을 쓰고 어디엔가 올리고 할까 싶은. 타인의 글을, 책을 읽으며 생각의 깊이와 배경지식의 광활함에 놀라곤 하는데, 그때마다 브런치는 닫고 얼른 숨어버리고 싶은걸 애써 참아낸다. 아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자꾸만 키보드를 두드려 활자를 생산해 내고 있는지.
그러던 중,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약간의 실마리는 찾게 된 것 같다. 그건 바로, 인생이 너무 힘들고 버거울 때, 외롭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어디엔가 나의 짐을 털어놓고 나누는 것 만으로 덜 외롭다고 해야 할까. 나 혼자만 힘든 것은 아닐 거야 라는, 기대감이라 하기에 이상하지만, 마음속 안전판이 사르르 피어나는 느낌이다. 나의 글을 읽고 한 명이라도 마음속에 울림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그녀는 지금, 혹은 과거 언젠가, 나와 비슷한 힘든 시간을 겪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넓은 세상에 단 한 명만이라도 존재한다면, 나 역시도 그 한 명만큼 덜 혼자일 테니까. 그리고 혹여나 언젠가 지금보다 내공이 늘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어느 누군가에겐 나의 글이 위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글이 나에게 갖는 의미는, 글을 쓰는 나의 능력이 오늘 현재 후졌을지라도 멈추지 않고 한 땀 한 땀 계속 써 내려가는 연속성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후졌다고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작은 꼬투리로 십중 포화를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 멀리 누군가에게는 따스함을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렇게 언젠가 돌고 돌아 나의 글로 얻은 온기를 그 누군가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에게는 나로 인해 세상이 아주 조금은 더 살만한 곳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게으름을 줄이고, 저점에서 턴을 해도 글을 조금씩 더 자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