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칼립투스 Dec 13. 2021

버티지 못한 게 실패는 아니잖아

"조금만 더 버텨보면 어때요? 프로젝트를 잠시 쉬거나 외부 facing 역할이 없는 보직으로 옮길 수 있을 텐데. OO 씨 능력이 너무 아깝잖아요." 


20대 중반 2년 다닌 컨설팅 회사 그만둘 때, 측은한 눈빛으로 선배들이 나를 만류하며 말했다. 당시 드물게 회사 지원을 받아 유학까지 다녀온 나로서는, 이자까지 다 쳐서 회사 지원금을 뱉어내고 결혼자금 대출까지 짊어지고 이직하는 게 맞는지 걱정할 만도 했지만, 그 회사를 계속 다니다가는 앓아눕던지 정신병이 걸리던지 성한 채로 남아날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당시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드러냈을 것이다. 




평소 유하고 되도록이면 사소한 일에 내 의사를 내세우는 편이 아님에도 일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 또는 누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껴질 때 지나치게 각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 좋게 잘 지내다가 사소한 일로 굳이 상대방이 나를 감정적으로 학대하게 만들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금껏 공적인 대화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할 뿐 '언제', '어떻게'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어린 시절을 독일계 문화에서 보낸 영향과 문제가 있으면 정면 돌파하는 O형 성격을 두루 타고나서일까. 돌이켜보면 지난 30년 남짓 이런 식으로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 듯하다. 


어릴 적부터 제발 외톨이만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나로선 이러한 내 결함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 신기할 정도이지만, 어쨌든 사실은 그러하다. 그나마 다행으로, 지금껏 내가 떠나온 숱한 직장들과 연락이 끊긴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내가 까이는 대신 먼저 차 버렸다. 부지런히 빚 갚던 시절 해고되거나 어린 아기를 두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등의 드라마틱한 불행은 운 좋게 잘 피해 다닌 셈이다. 하지만 초년운이 좋다 보면 어김없이 남들이 어릴 적 겪은 실패를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법. 밀린 불행을 한꺼번에 중년의 문턱에서 모질게 맞고 있다. 급기야 올 들어서는 1년 동안 세 번의 사표를 냈다. (1년 동안 낸 세 번의 사표에 관한 이야기는 별개의 글을 통해 다루도록 하겠다.) 


이쯤 되면 '버티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성격파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마흔 중반이 되도록 일하면서 누군가와 대놓고 앙숙으로 헤어진 적은 없었건만, 난생처음 소위 '로열패밀리'와 일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빵 터뜨리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평판 나쁜 사람들에게 잘못 걸린 거라 위로해주는 지인들도 있지만, 그럼 뭐하나. 피해는 내 몫이고, 이제 다시는 태생부터 나와 다른,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 베풀어주는 '후사'는 누릴 일이 없어졌으니. 잘 생기고 집안 좋고 결혼까지 잘한 (그러나 당최 말이 안 통하고 정보를 혼자 독점하며 거지같이 콤플렉스가 많던) 그 자식은 내가 그나마 열심히 잘 지낼 필요가 있는 대학원 동문 후배이기까지 하니, 모로 보나 이번 생은 제대로 망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상사들에게 잘근잘근 밟히고,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 남편의 극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곤 했다. 내가 껄끄러운 존재여서 그랬을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 고분고분하지 않은 태도가 그들을 자극했을까. 의도했던 건 분명 아님에도 정신을 차려보면 항상 남초인 직장에 굳이 들어가서 오래 참고 견디다 씹던 껌처럼 조직 밖으로 내뱉어지는 패턴이 오래도록 반복되어 왔다. 난 매번 남녀 구분 없이 일한다고 혼자서만 착각했었고, 그러는 동안 내내 싹싹하지 못한 여자인 것을 이유로 따돌림당했으며, 필연적으로 내쳐질 수밖에 없었다. 20년 동안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라는 곳에 소속감을 무척이나 그리워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너도 우리의 일원이야'란 동질감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딜 가도 모난 정, 튀는 존재였으며, 신기하게 내가 아무리 투명인간이 되려 노력해도 어디서든 나를 저격하고 나와 경쟁하며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의 감정을 잘 예측하고, 체면을 구기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고, 큰 충돌이 생기기 전에 에둘러 말하거나 때로는 '하얀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는 것.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정공법으로 돌파하려다 혼자 나가떨어지는 나에 비하면, 동방예의지국답게 윗사람 면을 살려주며 부드럽게 넘어가는 지혜를 탁월하게 발휘하는 그들이 부럽다. 욱할 때 순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잘 피하고 에둘러서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적절한 톤으로 원하는 것을 부드럽게 이야기할 줄 아는 그들.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좋은 면을 먼저 보고 되는 방향으로 모두를 북돋아주는 능력.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동하기를 기다려줄 줄 아는 인내심. 나에겐 무척 부족한 스킬들이다. 


어린 시절 누구도 나에게 알려준 적 없는, 남들로부터 신뢰받는 비결이란. 자신이 없어도 당당하고, 속에선 천불이 나도 한결같이 온화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며 단언 대신 질문으로 상대방이 스스로 의견이 바뀌기를 기다려주는 것. 이성과 논리가 아닌,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헤아리며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것. 세상 모든 리스크를 걱정하며 내일이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어두움을 양 팔 가득 끌어안고 무겁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어리석은 나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보다 잘 귀 기울일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나뭇잎이 철 지나면 가지에서 떨어지길 거부하는 대신 곱게 흙에 내려앉아 거름이 되듯. 이것이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방식을 버리고, 과거의 실패를 밑천 삼아 오늘부터 기어이 달라진 인생을 살아내고자 하는 나의 첫걸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1년 동안 세 번 사표를 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