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를 보여주고 싶다.
지금 책상 위의 현 상황은 '미친년 꽃다발'이라는 말과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종이더미와 쓰던 문구류와 열린 지갑에서는 크레디트 카드들 까지 쏟아져 나와있고 각종 영수증들 까지..
책상 위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노트에 그저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할 일목록은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곳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도 있지만 '읽을 책 고르기'같은 남들이 보면 웃을만한 목록도 있다.
해야 할 일만 죽 나열하려니 바쁜 일상에 약이 올라 심술이 난 마음으로 느긋할 때 할법한 일을 떡 하니 올려놓은 것이다.
바쁠 때는 장도 같이 바빠지나 보다.
화장실을 바쁘게 드나드니 말이다.
화장실을 자꾸 갔더니 몸에서 수분이 빠져서 목이 마르다.
오늘 마음에 드는 물컵을 골라(오늘은 그저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색 도자기 커피잔을 골랐다. 커피잔에 커피를 안 마시고 하루 종일 물을 마시기도 한다) 그리 차갑지 않은 생수를 따라 한숨에 마신다.
다시... 그 '미친년꽃다발' 같은 책상에 앉았다.
일에 치이고 그 일에 마음이 치여서 또다시 우울하다.
그래서 고른 일, 지금 바로 할 일은 '읽을 책 고르기'다
왠지 이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만 같다.
이걸 안 하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시간이 없어서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꽤 있다.
기다리고 있는 책들 중에는 나를 다잡는 자기 계발 도서들도 있고 '걸리버여행기' 같은 어릴 적에 동화책으로 읽었던, 그러나 이제 문학작품으로 나와있는 책도 있다.
읽지 못한 책들의 책 정면을 손가락으로 주욱 만져본다.
그곳에서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브런치에 접속을 하여 '독서인증'을 시작한다.
20분을 채 못 채우고 스톱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동하는 글을 쓰는 싶은 마음에, 마음이 바뀔까 두려워 노트북을 서둘러 열었다.
3주 정도 글을 쓰지 못했다.
일상의 일에 치일 때 가장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일이 '글쓰기'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글쓰기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호강에 겨운 양반계집'이 하는 일이 되어버려 뒤로 또 뒤로 보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대학교 때 썼던 다이어리를 여태 간직하고 있다.
10년 전쯤 한번 펼쳐본 다이어리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큰 글씨로 다짐하며 꼭꼭 눌러쓴 그 글씨는
가야 할 곳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며,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을...
훗훗.. 그때도 내가 나를 달래느라 별 말을 다 지어내고 있었더랬지...
그때는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느라 꽤나 힘이 들었었다.
재능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학과에서 하기 싫은 마음이 먼저 튀어나오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더라도 그 재능은 절대 앞을 비집고 나오지 못했으리라..
지금도 나는 나를 달래느라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를 달래느라 '버지니아울프'의 책을 읽게 하고
나를 달래느라 이 글을 쓰게 한다.
좋아하는 일을 먼저 하게 해 주고 힘든 일들을 내밀어 볼 생각으로 빤한 수를 쓰고 있다.
따뜻한 옥수수차를 한잔 마시고 책을 읽고 글을 쓰니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의 우울이 가시는 듯하다.
어제 '흑백 요리사 시즌 2'의 마지막 회를 보며 좀 울었다.
마지막 요리대결의 주제는 '나를 위한 요리'였다.
셰프들은 나를 위한 요리는 해본 적이 없다며 어리둥절했다.
우승을 거머쥔 '최강록'셰프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재료들을 다 때려 넣고(떄려 넣었다고 했지만 갖은 정성을 다 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냥' 개발한('그냥'이라고 했지만 연구와 긴 공부 끝에 얻은 레시피 일 것이다) 진한 육수를 만들어 요리를 완성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 셰프들은 항상 남을 위해 요리를 하지 본인을 위해 요리를 한 적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도 자기를 위해서는 라면 정도밖에 끓여준 적이 없다고.. 그래서 오늘 만든 요리는 '막 '만들었다고.. 자신을 위해서 어렵고 복잡한 요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함께 있던 모든 셰프들이 숙연해졌었다.
나 역시 내가 나를 위한 요리를 한다는 상상만으로 벌써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혼을 한 후 식구들 먹이느라 요리사도 아닌 내가 별수를 다 생각해 내어 수많은 날들을 인내로 밥을 짓지 않았던가..
아내로, 엄마로 사느라 인고의 세월을 겪었고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는 나에게 오늘은 나를 위해 책을 읽고, 나를 위해 글을 쓰게 해 준다.
모르겠다.
오늘은 그저 '호강에 겨운 양반계집'이 되고 내일에게 나를 맡겨볼 생각이다.
그래도 책상은 좀 치워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