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숟가락이면 됐다.

양푼 비빔밥

by Cheersjoo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넣고 비비기만 하면, 그것은 순식간에 드라마 여주인공도 실연을 위로받는 최고의 음식이 된다. 특히, 큰 양푼에 푸짐하게 비벼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 그 감칠맛은 배가된다. 참! 이때 주의할 점은 굳이 개인 그릇에 덜어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숟가락 하나씩 딱! 들고 달려들어 다 같이 푹푹 퍼 먹어야 한다. 그래야 비빔밥의 참 맛과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벌써 70대에 접어드신 둘째 외삼촌도 비빔밥의 그 맛을 특별하게, 그리고 가슴 시리게 품고 계시다.




장녀인 우리 어머니는 동생이 무려 일곱 명이시다. 외할머니가 딸 넷, 아들 넷을 기가 막힐 정도로 균형 있게 낳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이 집안에 장가 옴과 동시에 시골에 사시는 장인, 장모를 대신하여 일곱 동생을 동반 책임지게 되셨다. 그 '동반자'가 이 '동반자'일 줄은 상상도 못 하셨을 거다.


요즘 생각과 주장으로 대체 사위가 왜 그래야 하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일단은 '옛날엔 다들 그랬다'로 넘어가자. 아무튼 화악리 이씨네 맏사위의 '처음 보는 애들 키우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작은 괜찮았다. 듬직하고 서글서글한 맞선남에게 큰 처제를 안전하게 시집보냈고, 착하고 성실한 큰 처남은 대학까지 졸업시켜 장가도 보냈다. 영리하고 똘똘한 셋째 처남과 막내 처남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잘 자라 어엿한 회사원과 직업 군인이 되었으며, 장가 왔을 때 각각 6살, 4살이었던 코찔찔이 어린 두 처제들은 교복을 입기 시작한 날부터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날까지 아버지의 예쁜 손가락이 되었다.


하지만 한 편의 드라마가 이렇게 순순히 끝날 리 없었다. 문제는 둘째 처남이었다.


어른들이 옛날이야기를 해주실 때면 언제나 대명사가 '그 노무 자식'이었던 둘째 삼촌은, 최소 충남 대표 말썽꾸러기였다. 높은 나무 위에 제비가 정성껏 지은 집을 긴 작대기로 부순 일화는 애교였고, 동네 꼽추 아주머니를 놀리다 할아버지한테 삽으로 맞은 사건은 온 식구들의 얼굴을 아직도 화끈거리게 하는 흑역사다.


그러니 줄곧 성공가도를 달리던 우리 아버지에게 '그 노무 자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존재였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니, 사람을 만들어달라는 장인의 간곡한 부탁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열네 살이 된 '그 노무 자식'은 다니러 온 첫째 딸과 사위의 손에 이끌려 서울이란 곳에 처음 올라오게 되었다. 왜? 중학교 입학시험에 똑!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노무 자식'은 큰 매형의 정성과 사랑 덕에 점차 집 나갔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그의 드라마는 시작되었다. 게다가 뒤늦게 서울로 올라온 둘도 없는 죽마고우와 고.등.학.교.에도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극적 반전. 그것을 '그 노무 자식'이 매형의 전략과 사랑 덕에 이루어낸 것이다!


그 후, '그 노무 자식', 아니, (이제 정신 차렸으니) 둘째 외삼촌은 얹혀살던 큰 매형 집을 나왔다. 누나가 둘째 아이를 낳아 안 그래도 좁은 단칸방이 더 좁아졌고, 더 이상은 매형을 힘들게 하기 미안해서였다. (정말 정신 차렸다.) 그렇게 삼촌은 누나네 집에 이어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하는 서울의 하루하루는 즐거웠다. 없는 살림이고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두 집안이 다 인정할 만큼 형제같이 지냈던 친구와의 나날이 신났다. 이제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하고 싶은 장사를 하며 장가도 가고, 부모님과 고마운 큰 누나, 매형에게 효도도 해야겠다 다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날과 같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던 둘째 삼촌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목에 치약 거품이 넘어가는 듯하여 기침을 몇 번 했는데, 피가 나온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듯 휴지나 천에 묻는 정도가 아니라 덩어리로... 붉고 검은 덩어리로 말이다.


결핵이었다.

환경도 좋지 않았고, 마음만 즐거웠지 제때 좋은 음식을 챙겨 먹지 못했던 한 청소년이 결국 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아직 어리고 여린 삼촌은 겁이 났다.

'누나와 매형에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시골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

결국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힘들게 한 누나와 매형에겐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어 말하지 못했고, 안 그래도 겨우 사람 되었다고 좋아하시는 시골의 부모님께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10대의 어린 삼촌은 혼자만의 아픈 비밀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소중한 친구, 형제보다 더 뜨거운 내 친구에게서도 떠나자고.


"얌마, 나 이제 나갈란다."

"나간다고? 어딜?"

"집 나간다고."

"왜?"

"..."

"뭔데 인마?"

"결핵이라더라. 너한테 옮으면 어떡하냐."

"..."


침묵이 흘렀다. 두 소년은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삼촌의 친구는 방 안으로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 사이 주섬주섬 얼마 안 되는 짐을 싸던 삼촌은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새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와서 밥이나 처먹어."


비빔밥이었다.

양푼에 밥과 김치를 넣어 쓱쓱 비빈 조촐한 비빔밥엔 두 개의 숟가락이 꽂혀있었다.

각자 덜어먹을 앞 접시 따윈 없었다. 그저 숟가락 두 개가 상차림의 전부였고, 그저 뜨거운 우정 하나가 그 순간의 전부였다.


매일 밤 친구는 삼촌의 몸에 주사기를 찔렀다. 여전히 밥을 함께 먹었고, 병마와 함께 싸웠다. 그렇게 두 친구의 10대는 아프고 뜨겁게 지나갔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나는 그날 오전 갑작스러운 둘째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당뇨에 좋다는 게 있어서. 엄마 좀 갖다 드리려고. 삼촌 조금 있다가 도착한다!"


이렇게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삼촌들 중 가장 좋아하는 삼촌이라 반갑긴 했지만, 한편으론 어색함이 걱정되었다. 엄마도 외출하시고 혼자 있는 집에서 외삼촌과 단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지?


하지만 망나니 같던 (내가 한 말 아니다. 삼촌이 직접 하신 표현이다.) 자신을 사람 만들어준 큰 매형 이야기로 시작해 그동안 전혀 몰랐던 투병 이야기를 하시는 내내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조카가 귀엽다는 듯 그저 등허리 툭툭 몇 대 쳐주시는 삼촌의 손길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삼촌은 여전히 개구쟁이의 기운이 남아있어 농담을 잘하시고, 발가락 양말도 신으신다. 어느새 40대가 훌쩍 넘었거나 그 언저리가 된 '수많은' 조카들에게 디스크 예방 건강 운동도 가르쳐 주신다.


다음에 삼촌이 놀러 오시면 비빔밥이나 한잔 하자고 해볼까 한다. 앞 접시 이런 거 다 필요 없으니, 숟가락이나 하나씩 들고 먹자며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각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