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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끝자락에서

1.1. 

    2023년 6월,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CHA (Cambridge Health Alliance) 병원의 소아정신과 외래 진료실. 병원 본관을 굽어보고 있는 건물 4층이다. 한때 간호사 기숙사로 쓰였던 빨간 벽돌 건물이다. 정들었던 2년이 저물어 간다. 여기서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을 만나왔다. 한쪽 선반에는 층별로 장난감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레고 조각들이 들어 있는 노란 플라스틱 통, 가지런하지는 않지만 정렬된 보드게임 상자들, 플라스틱 공룡들과 동물들이 들어 있는 바구니가 보인다. 선반 반대쪽 벽면에는 세월의 흔적을 품은 화이트보드가 매달려 있다. 그 앞 조그만 책상에는 종이 몇 장과 4색 마커가 놓여있다. 진료실을 거쳐간 수련의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놀이치료용 장난감을 한두 개씩 더했다. 그렇기에 수련의들 진료실마다 느껴지는 역사는 특색이 있다. 내가 쓰던 진료실에는 천장에 벨크로 공이 달라붙는 화려한 색의 과녁이 매달려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큰 유리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초여름 날이다. 과녁은 바람을 타고 게으르게 돌고 있다.

    

    처음 전임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진료실을 배정받고 선배의 안내로 처음 들어왔던 날이 기억난다. COVID-19 판데믹이 꺾이고 이제 곧 이전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찼던 2021년 7월. 작은 모니터를 통해 환자를 만났던 1년이 지나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실제로 못 만났던 환자도 많았다. 모니터 속의 내가 아닌, 실제 세계의 치료자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대면 진료에 대한 희망.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잔디와 커다란 나무가 드리운 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는 병원 직원들의 모습에서도 희망이 느껴졌다. 좋은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작.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고자 결심했던 배경에는 정신역동적 정신치료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기에 내가 가장 희망했던 CHA에서 수련을 시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다른 마음 한편에는 바빴던 전공의 생활이 끝났으니 좀 더 편한 수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도 있었다. 케임브리지라는 역사가 숨 쉬는 도시를 아내와 아이와 함께 알아간다는 두근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판데믹은 겨울이 되면서 다시 기지개를 켰다. 원격 진료가 재개되었다. 배워야 하는 지식의 분량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고, 집에 오면 막 걷기 시작한 아이 육아를 도왔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이민자 신분은 보스턴의 겨울 날씨 같았다. 참 시렸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전공의 때보다 바쁜 생활을 했다. 교수님들은 졸업생들이 병원과 학교 명예에 먹칠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수련의가 부족한 점이 보이면 추가 지도 전문의를 붙여서 성심껏 가르치셨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아이들이 쓰는 쉬운 영어가 더 어려웠다. 초반에 나를 지도했던 교수님이 내가 아이들의 언어 수준에 공감을 못한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전임의를 막 시작했을 무렵 복통을 표현하는 용어인 abdominal pain은 알아도 tummy pain은 모르는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아정신과 수련 내내 남들보다 큰 배움의 고통이 따랐다.


    CHA는 보스턴 북부 광역 지역의 의료 안전망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사보험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이나 불법 이민자에게도 매사추세츠 주 보조를 받아 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했다. 환자의 절반 이상이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를 주 언어로 사용했다. 통역을 사용하면 진료 시간이 자연스레 길어지고 에너지가 더 많이 든다. CHA 소아정신과 전임의 과정에서는 2년에 걸쳐 가족 치료 기술을 배웠다. 그간 정신과 수련으로 체득한 이자 선형 질문법과 다른 새로운 기법을 익혀야 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받는 환경이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비영어권 가족을 대상으로 피교육자 신분으로 이루어내는 건 정말 뼈를 깎는 과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혼란스러운 초보 가족치료사의 멘트를 통역해야 했던 통역사의 고뇌도 컸으리라. 매주 화요일 저녁 6시에 걸려오는 통역 요청 전화를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던 분들께 늦었지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가족이 모두 참여해야 하는 가족 치료는 항상 7시가 넘어서 끝났다. 지도 전문의와 토의할 사항을 정리하고 걸어서 퇴근하는 길. 케임브리지 겨울밤은 참 춥고 길었다.


    전임의 기간엔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얘기를 하고 나면 1시간 정도 깨어 있을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낮시간에 교수님들에게서 배운 지식들과 환자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끄적여 놓은 메모들, 포부 있게 읽고자 책갈피를 꽂아 놓은 논문과 책들을 들춰봐야 했다. 물론 나 스스로에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자괴감을 자장가 삼아 잠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전임의 동료들도 비슷한 고민들이 있었다. 그래서 함께 해결방안을 고심해 봤다. 그리하여 체계적인 분류 체계로 자료를 우선 저장만 잘해 놓자는 안이 나왔다. 졸업한 후 미래의 우리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자료를 꺼내 보자고 약속했다. 수련의 끝자락에 클라우드 폴더에는 참 많은 문서와 이미지 파일들이 쌓였다. 졸업식 전에는 꼭 잊지 말고 다운로드하여 가야지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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