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서울 신도림에 둥지를 튼지 4년, 2번째 전세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
미세먼지로 가득한 서울 하늘이 숨이 막혔다.
점점 일상에 매몰돼가는 하루하루가 지치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컴퓨터만 있다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우리였지만,
‘어디서나’ 일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서울이었다.
빡빡하고 날이 서있는 일상을 전환하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았다.
실험해보고 싶었다.
정말 컴퓨터만 있다면 어디서나 일하면서 경제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이들과 함께 일상의 소박함을 느끼며 한템포 느리게 살아도 되는가?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전세만료와 함께 캐리어 4개에 짐을 싸고 발리의 우붓으로 훌쩍 떠나왔다.
후훗, 우붓으로 오면 한템포 느리게 여유로운 삶을 살 줄 알았지...
우붓에 와서 어느 것하나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볕이 잘 들고 밝아 계약한 집에서는 10개월간 곰팡이와 누수와 싸워야 했고,
미리 알아보고 온 아이들 학교는 정원이 차 보낼 수가 없게 되버려 동분서주했고,
그나마 학교를 보내고 보니, 수많은 공휴일들과 방학 덕분에 등교일이 일년의 절반밖에 안되는 걸 깨닫고서 기함을 했다. 우리는 언제 일하란 말인가.
이 와중에 반쯤 당한 비자연장 사기, 화산분화와 지진등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빼곡히 치고 들어와 혼을 빼놓았다.
우붓에서 느리고 여유롭게 살 줄 알았는데, 매일 매일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우붓이 좋았다.
너무 지쳐 저녁만 되면 나가떨어졌지만 왠지 우붓이 좋아 떠날 수 가 없었다.
하루라도 손 안 가는 날이 없는 집이었지만, 2층 방 창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초록이 한숨 돌리게 했다.
새로 찾게된 작디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은 행복해했고 나 역시 이 학교를 사랑하게 됐다.
예상치 못한 보스몹 같은 사건 사고들을 처리하면서 우리의 생존스킬이 늘어나고 있다며 시원한 빈땅 한병을 손에 들고 서로의 노고도 치하한다.
이 곳에 와 새로 만나게 된 이웃들이 우붓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우붓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급할게 없기 때문에 다른 이를 급하게 재촉하지 않는 여유로움.
언제나 아이들에게 미소를 띄며 여유롭게 기다려주는 사람들.
전세계에서 온 장기체류자들과 힌두와 공동체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현지인들의 묘한 조합.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며 나오는 그 독특한 분위기, 관용.
지난 1년 반동안 그토록 꿈꾸던 '매일 색다른 하루'를 평화로운 우붓에서 전쟁 같이 보내며,
아이들과 함께 디지털 노마드로 산다는 건 어느 것 하나 계획대로 흘러가는게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혹시 아이와 함께 디지털 노마드를 준비하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우붓을 한번 경험해보셨음 하는 이 마음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