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자문 데뷔기
서울시 신체활동 및 비만 예방사업 관련 전문가 자문회의 (2022) - 주최 : 서울시
뉴트리셔스 스튜디오 & Lab.이라는 브랜드에 신뢰도가 쌓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직접 수주를 따서 외부 프로젝트를 하기까지 기간이 걸렸다. 운이 좋았던 건 이 무렵 공공기관과 회사에서 자문위원을 구할 때 원하는 전문가 역량이 바뀌기 시작했다. 대부분 교수님들로 구성된 자문위원에서 실무, 현장에 있으면서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니즈가 바뀌면서 '역량을 갖춘 영양파트 전문가'로 참여할 기회들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 08화 보건과 영양 서비스,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2) 중
서울특별시청 입성.
크, 다시 써도 짜릿하다.
지금은 좀 익숙해졌지만, 이때는 자문을 거의 해본 적 없을 때라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서울시요? 제가요?"라며 반문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일어난 각종 '처음'들은 얼떨떨하게 시작될 때가 많다. 나의 자문 데뷔도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대학원 과정을 병행하고 있었는데 지도 교수님께 가서도 "제가 급한 건 맞는데, 그래도 누울 자리는 보고 뻗는데.. 들어온다고 다 하는 게 맞을까요?" 물어볼 만큼 스스로 생각건대 이르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라인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던 건 '자문'에 대해 잘 모르던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고 이 회의를 준비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아티스트들 간의 콜라보 혹은 소속사에서 DM으로 섭외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겠지만, 이런 전문가 섭외도 DM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걸 상상 못 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그랬다.
대학생 때부터 진로 고민, 대학원 생활, 하는 일을 인스타그램 포스팅으로 남겼었는데 그게 누적이 되면서 캐주얼한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친으로 영양, 보건 계통 분들도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그분들 중 주무관으로 계신 한 선생님이 DM을 보내신 거다.
"선생님 혹시 서울시에서 ㅇㅇㅇ...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 번호는 010-xxx-xxxx."
안면 있는 아이디가 아니었다면 "뭐야.."하고 지웠을 텐데, 포스팅을 본 기억이 나서 긴가민가하며 전화드린 게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서울시는 영양 파트 자문위원을 새롭게 찾고 있었고, 조건이 학계만이 아닌 현업과 시장에서 활발하게 일하고 있고 공중 보건 쪽에 관심을 가지고 제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추천한 주무관님은 꽤 오랫동안 인스타그램 포스팅으로 나의 지난 활동들을 지켜보았고, 심리학과 영양학을 같이 전공한 사람이 자문으로 들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시에 추천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주신 거라고 했다.
설렜다.
하기로 결정을 하고선 떨렸지만 솔직히 설렘이 더 컸다.
1:1, 소규모 집단보다 큰 곳에서 진행하는 사업 모델은 어떨까?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비만 예방에 개입하는 공공모델에 발언을 할 수 있다니, 영광이다 정신 차리고 잘 준비해야겠다.
다음 화(한국영양학회 식품자전거 홍보 전문가 자문)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인스타그램은 내게 다양하고 많은 일감을 연결시켜 주었다. 성장과 활동 기록용이었던 피드가 이런 식으로 효도를 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과 별개로 내 활동을 볼 수 있는 '아카이빙'된 온라인 공간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좋은 연이 닿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입 사원이 처음 회사에 들어갈 때 가진 열정과 패기!처럼
신입 자문위원은 본인이 무조건 어린 축에 속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회의의 취지와 자료라도 똑바로 다 숙지하자는 마음으로 자문 계획서(8p)에 사례로 적힌 비만예방사업 자료들까지 받아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시민 신체활동 종합계획, 2016년 - 2019년 비만 예방사업 성과 자료집 등)
그때는 이런 생각이었다.
'자문이라는 이름으로 이상적으로 제언하지 않으려면 최대한 사업 현황과 맥락을 파악해야 된다. 그리고 영양 파트에서 사업을 담당할 보건소 선생님들의 업무 상황을 대략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거 디펜스 잘해야 된다.'
그래서 변호사가 판례 공부하듯이 지난 자료집들을 찾아보고 검색하며 공부했다.
공부로 접하던 공중보건학 책 보다 짧은 pdf였지만, 2013년부터 10년간 추진한 사업의 추진 경과, 성과, 문제점, 개선방안을 보면서 이 안에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500개소 10000명의 어린이집 아동을 대상으로 보육교사들이 진행한 신체 활동 역량 강화 교육, 100개 초중고에서 50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학교 아침 걷기 사업, 15만 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걷기 마일리지 사업 등 대상도, 내용도 다양하다 보니 설명 하나하나는 짧아도 진짜.. 많았다.
공중보건사업은 장기 목표 (ex.5개년 사업) 하에 설계된 사업 구조들이 많고 큰 방향과 별개로 자치구 상황에 따라 수정해서 사업을 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해에 많은 사업들이 출범한다. 그리고 이해 관계자들이 많다. 자치구 의견, 시민 여론조사 결과, 사업 기획 의도, 흐름에 따른 변화와 사업 중단 여부를 같이 보면서 정리해야 했다.
그런데 쓰다보니 너무 많았다.
내가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20분 내외일 텐데 덮어놓고 다 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나름의 우선순위를 세웠다.
1. 참신한 거 하지 말고, 맥락과 다양한 사업 속 공통된 문제점을 먼저 찾자.
2. 자문 내용이 많지만 제일 큰 구멍 혹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부터 우선순위로 정리하자.
3. 발표로 말할 부분은 중요한 내용, 나머지는 문서로 정리해서 전달드리자.
(나중에 기업 분석을 하는 컨설턴트들이 실전 케이스 연습하는 책을 사서 보니 이런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나름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ㅎㅎ)
그리고 더 좋은 모델 방향을 제안하기 위해 여러 논문을 찾아 함께 정리를 했다.
그렇게 자문을 준비하다 보니 문득 연구할 때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를 세우고, 부족한 연구 방향을 채우기 위해 논문을 찾고 정리하고 그런 작업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됐다.
아, 자문이란 내가 높은 지위에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해 내가 가진 전문적 지식과 경험으로 도울 수 있으면 가능한 거구나.
그렇게 자문 당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직도 첫 회의 당시 책상 배치와 공기가 기억날 만큼 나에게 임팩트 있던 날이었다.
서울 시청은 도서관 간다고 들어가 본 게 다였는데, 1층에 들어갈 때 조금 설레기도 했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서울시 많은 자치구 주무관님들이 참석하셨고, 내 양 옆 앞 뒤에는 한 20년 이상의 경력차이가 날 것 같은 교수님, 전문가 분들이 오셨다. 깃털 같이 움직이면서 명함 드리고 인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책상에 20cm 남짓 두께의 A4 용지를 올려놓고 버벅거리지 않기 위해서 포스트잇도 열심히 붙여서 약간의 긴장된 마음으로 자문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 한차례 더 진행되었었다. 코로나 시기라서 중단된 사업 중에 어떤 것은 진행해야 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 정리하는 게 나은지 찬반 이야기도 나왔고 비만 예방이라는 큰 주제 산하 각 파트 (ex. 운동, 의료, 영양)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해당 사업을 만들 때 참여한 분과, 사업이 만들고 나서 참여한 자문단 사이의 텐션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입장 차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조율해 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자문이 끝났다.
회의 내용을 상세하게 다룰 순 없지만, 공중 보건 사업의 특성상 우리가 고민하고 수용해야 할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며 마무리 짓고 싶다. 공중 보건 사업은 좋은 기획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저예산으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운영 시 인력 확보가 늘 어렵고, 콘텐츠나 홍보 개발에 많은 비용을 쓰기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가장 보편적인 '대중'과 취약계층을 모두 상대하며 케어하고 있는 전문가 헬스케어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사기업에 비해 뾰족하고 에지 있는 홍보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떠한 대중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용어나 개념이 되어선 '안'되기 때문에 표현을 형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어떤 다른 대안 (ex. 디자인, 세부 타깃)으로 풀지에 대한 숙고도 필요하다.
부처 간에 중복 사업 추진이 되지 않도록 사업 설계 시 고려해야 한다. (ex. 학교 내 사업을 교육청도, 건강관리과에서도 하면 충돌이 발생한다).
시민의 의견 수용이 가장 중요하지만, 실무를 반영하지 않은 개선은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Top-down 형식보다 Bottom-up 형식이 앞으로 더욱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