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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an 24. 2019

SKY 캐슬, 누가 거짓말을 하고있나

문제는 사교육이 아니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SKY 캐슬>을 틀었다, 마지막 회를 본방으로 보려면 정주행을 시작해야 할 마지노선이었다. 딱 5분 정도 보고 껐다(we all lie도 못 듣고). 그 5분 동안 등장한 모든 캐릭터들은 자녀가/자신이 명문대 입학에 다가서면 해맑게 기뻐하고, 멀어지면 차가운 분노와 불안을 내뿜었다. 마지막 장면으로 남은 것은 차 안에서 이뤄진 예서와 서진의 대화였다. “엄마짱!! 짱짱짱!” “그렇게 좋아?” “영재 오빠 포트폴리오만 있으면 황금 로드맵이 생기는 거잖아” 나는 도저히 이 감정을 20시간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숙명여고 사태가 떠올랐다. 강남 입시 명문사립고의 교무부장이 시험지를 유출해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주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여론의 판단은 교육청 조사와 검찰 수사보다 빨랐다.


유죄. 파렴치범.


여론을 등에 업은 언론의 린치가 시작됐다. 마치 그들이 엽기살인의 피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준이었다. 숙명여고 앞에서는 매일 촛불집회까지 열렸다. 너도나도 ‘대학입시의 공정성’을 외쳤고, 공정성에는 수능이 제맛이라며 정시 100% 시행하라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왜 이렇게 오버야? 라는 의문은 숙명여고에선 내신 등수가 바뀌면 대학 간판이 바뀐다는 증언과 함께 무시당했다.



사태가 좀 잦아들었던 11월 하순, 올 겨울 최고의 히트작 드라마 <SKY 캐슬>이 시작됐다. 뉴스란에서 넘실대던 욕망이 연예란으로 옮겨갔다. 명문대에 대한 욕망.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겠다는, 내가 명문대에 가고 싶다는, 내가 명문대에 가고 싶었다는, 바로 그 욕망. 물론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를 즐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일부 플롯의 허술함과 온갖 엽기적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가 이 사회의 명문대를 향한 욕망의 보편성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거대한 욕망과 객관식이면 일단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납작한 인식 앞에서 교육의 의미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교육이 수행해야 할 여러 기능 중에 한국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인정받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즉 고등학교라면 대학으로, 대학이라면 취업시장으로 가기 위한 선발기능 뿐이다. 한 사람의 성장이란 무엇인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교육학과 대학원생을 제외하면 극소수일 것이다. <SKY 캐슬>현상을 다룬 기사를 보니 현직 교사가 이건 욕망에 대한 드라마지 교육 드라마가 아니라고 했다는데 글쎄, 한국사회는 그 욕망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것 아닐까.



그래서 ‘교육기관’인 학교에서도 성장이든 재미든 다른 무엇이든, 아무튼 뭐라도 생의 의미를 추구하려 들면 피곤해진다. 본능을 꽁꽁 싸매고 끔찍한 수준의 경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는 것만이 권장된다. 그 결과는 처참하게도 한국 10대 사망 원인 1위가 몇 년째 ‘자살’이라는 사실이다. 저출산 저성장 시대에 생산가능인구 줄어든다고 너도나도 아우성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10대의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 다행히도 살아있는 10대의 삶 역시 안녕하기 쉽지 않다. 대다수 학생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똑같은 시험문제 풀어제끼는데 쓸데없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건 1차적으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10대의 인권문제다. 장기적으로는 미래 노동자의 생산성(그게 창의력이든 문제해결능력이든 감수성이든)을 깎아먹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재생산 실패, 사회의 성장 동력 상실 문제기도 하다.



그러니 뭐라도 바꿔야 한다. 워라밸은 직장인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학생들에게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경험의 여백이 필요하다. 같은 목표, 같은 방식의 평가기준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 기회를 주는 방법은 학교를 선발의 공간이 아니라 교육의 공간으로, 성장의 기회가 촉진되는 제도로 만드는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대학 서열을 완화하면 된다. 어떻게 서열을 완화할 수 있나. 국립대 평준화 네트워크는 2000년대 초반부터 나온 대안이다. 재작년인가 국립대 총장들이 모여서 네트워크 운영을 추진한 적도 있다. 지금이라도 교육부가 의지를 가지고 나서면 불가능하지 않다. 국립대만 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사립대는 예산이나 지배구조나 준공영에 가깝다. 사학법인의 사유재산 운운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는 설립 이후 지금까지 그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특혜를 금액으로 환산해보면 알 수 있다. 어차피 인구절벽 때문에 대학은 곧 위기상황에 처한다(혹은 이미 처해있다). 교육의 공공성을 살려가자는 정책에 개별 대학이 협조하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대학서열 완화 없이 살인적인 입시경쟁이나
사교육 과열을 해결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교육을 줄이는 방법은 사교육 효과를 제거하는 것이다. 일제고사식 평가를 없애고 교사별 평가를 강화하면 된다. 벌써부터 ‘그래서는 공정한 평가가 어렵다’는 외침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학생별 맞춤형 평가가 아니라 줄세우기식 평가만이 공정한 평가로 인정받는다. 착착착착 배치표에 맞춰서 앞으로 나란히 할 수 있는 방식의 평가가 아니면 평가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재 수준을 확인해 더 나은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거로 삼는 것 아니냐고 답하면 코웃음이 돌아온다. 이래서야 도돌이표다.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입시제도 설계의 ‘묘안’이 아니다. 그동안 입시제도가 복잡해질수록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학생부종합전형, 소위 학종이 대표적인 사례다. 경쟁의 강도는 그대로 두면서, 혹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상황에서 룰만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경쟁은 왜 심해지는가. 자원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결국


학종이든 정시든 입시제도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학벌자원의 희소성을 희석시켜야 한다.


대학서열이 완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둔 채 백날 학종의 장점을 강조해봐야 그 취지를 살릴 방법은 없다.


따라서 교육개혁 앞에 놓인 장애물은 대학의 저항이 아니다. 사회에 뿌리박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명문대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야 한다. 대학서열 완화는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 심각하지 않아서, 합리적인 대안이 없어서 외면 받는 이슈가 아니다. 대중의 욕망을 거스르기 때문에 언론도 정치인도 나서지 않는 이슈다(그들 역시 자식은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SKY 캐슬>에서 사회비판이랍시고 온갖 추태를 전시해도 오히려 사교육 시장이 간접홍보 효과를 누린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제자를 몰아붙이는 스승이 등장하는 영화 <위플래시>가 개봉했을 때도 ‘참교육 스토리’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위플래시>


이 욕망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가 교육개혁의 핵심이다. <SKY 캐슬>이 사회비판 드라마인 척 할 수 있는 이유는 명문대를 향한 욕망에 비극적 사건을 묶어 ‘끔찍함’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 세상에 저런 사교육도 있었네 내 자식도 해줘야지라는 부모들의 욕망을 제작진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리고 재벌을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그 끔찍함마저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을 보면  <SKY 캐슬>이라는 라마의 의도 자체가 한국의 미친 교육제도와 끔찍한 욕망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고 보긴 어렵다(드라마가 꼭 사회비판을 할 필요도 없고). 화제의 OST 제목처럼,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겐 공고한 대학의 서열체제와 그에 따른 살인적 입시경쟁이 파괴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이름값 좀 더 있는 대학 보내겠다고 하루 4~5시간씩 자면서 똑같은 문제풀이를 매일같이 반복하는 것은 ‘비정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대중의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게 어렵다고 대학 서열체제는 그대로 둔 채 입시제도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봐야 의미 없다. 경쟁은 지속될 것이고,


사교육은 언제나 그랬듯 공교육을 앞설 것이다.


<SKY 캐슬> 같은 드라마는 인기를 끌겠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나는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라 말하는 10대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현재 학벌자원을 나누는 근거가 되는 ‘시험의 공정성’에 대한 환상 역시 깨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대중의 욕망이 크다고 제도적 개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을 보자. 종부세 납입대상이 전국민의 2%가 못돼도 조세저항이 큰 이유는 보수언론의 흑색선전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부동산으로 차익을 거둔 사람들뿐만 아니라 상당수 국민들이 부동산으로 돈 벌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자기들은 벌어놓고 왜 나는 못 벌게 해? 비트코인 규제가 나왔을 때 정부지지율이 떨어진 것에서도 비슷한 불만이 관측됐다. 그렇지만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정부의 규제정책도 꾸준히 등장한다.


반면에 명문대에 대한 욕망은 제도적 개입을 통해 조절되지 않는다. 공정한 시험이라는 필터가 대학서열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네가 명문대에 못간 이유는 실력이 부족해서잖아.


실력이 뭐냐고? 시험 성적이지. 실력이 부족해서 다른 대우를 받는 건 차별이 아니라 공정함이야. 이게 대다수 국민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차별의 정당화 논리다.


단답형 시험은 (누구나 외쳐대는) 창의력이나 문제해결능력은 물론이고 성실함이라든가 한 사람이 가진 경험의 의미, 그로부터 나오는 잠재력을 측정하기에는 턱없이 단순한 평가도구다. 장점이 있다면 숫자로 줄세우기 좋다는 것 정도다. 한국에선 교육기관에서조차 성장과 교육보다 평가와 줄세우기가 존중받는다



시험이 온갖 차별의 근거가 되는 건 학교뿐만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정규직들을 보자. 비정규직은 시험을 안 보고 뽑혀서 고용안정성과 충분한 임금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한다. 이미 함께 회사를 굴려온 동료노동자들의 경험보다 NCS니 인적성이니 하는 시험성적이 좋은 ‘취업준비생’들의 역량이 뛰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 회사는 업무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하긴 그러니까 저런 주장을 스스럼없이 내놓는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정규직 되려고 얼마나 오래 시험공부를 했고, 경쟁률이 얼마였고 등등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무임승차라며 억울해하는 근거조차 줄세우기와 시험으로 수렴된다. 이 정도면 한국사회에서 시험은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덮어버리고 싶다면 부동산을 시험 봐서 나눠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험이 능력을 보증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능력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여와 저임금, 장시간노동이라는 희생 없이 그 회사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누리는 고임금을 뒷받침할 생산성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런 착각을 ‘사단장의 오류’라고 한다. 사단장이 테니스장을 지어라, 라고 말하고 이틀 만에 테니스장이 생기면 그게 사단장의 생산성인가. 실제 테니스장을 만들어낸 부하군인들의 생산성을 가로챈 것에 불과하다.


비꼬자면 끝이 없지만 어쨌든 한국 사회에서 시험의 공정성이라는 환상을 깨는 것은 대학을 평준화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처럼 느껴진다. 정부여당이 집권연장 포기하고 대학서열을 완화시키겠다고 나서면 다시 촛불집회가 열릴지도 모른다. 숙명여고 앞에서도 매일 열렸는데 못 열릴 게 무엇인가. 그러고 보면 2016년 촛불집회의 도화선도 정유라의 이화여대 학사비리였다.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나온 뒤에도 정유라의 입학, 성적처리 문제는 촛불집회가 이어지는 몇 달간 끊임없이 호출됐다. 이쯤 되면


시험과 공정성은 시대정신에 가깝다.


쓰고 보니 교육개혁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유은혜 교육부총리는 그 불가능한 일에 직을 걸 생각은 없어 보인다. 교육운동진영은 입시가 한국사회 교육문제의 근원이라는 말을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왔다.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들을 타격하기 위해서는 방향성뿐만 아니라 전략도 필요하다. 어떻게 대중의 욕망을 거스르는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지지를 확보할 것인가?




모르겠다. (내가 알면 이미 했지...) 그저 내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예컨대, 뜬금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다. 대학 서열 완화는 제도의 영역이다. 이를 위해 당장 현장의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어떤 ‘마음’을 갖는 것은 가능하다. 교육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수백 수천가지 답이 나올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을 취재하던 동기에게 들은 이야기다. 교직원 중에 “쌍둥이가 걱정된다”고 말한 분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감히 시험지를 유출해 시대정신인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냐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이미 돌을 던졌거나 던질 준비를 하고 있던 쌍둥이를, 그는 걱정하고 있었다. 모두 거짓말을 하는 <SKY 캐슬>의 시대, 그의 말 역시 거짓이었을까? 취재내용은 언론 보도를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었고, 그에겐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학생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사실을 숨기거나 무조건 감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법대로 처벌 받으면 될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 책임에 비해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제자를 염려하는, 제자들의 영혼 앞에 놓인 어둠을 걷어내주고 싶은 마음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에, 그리고 사회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공정성 수호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지키려는 가치보다는 이쪽이 ‘교육’이라는 이름에 더 어울리는 마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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