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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ul 26. 2017

4차 산업혁명과 대학 #3

대학의 무능

2017년 7월 21일. <오늘의 교육> 39호.


글 순서

1. 사회수요맞춤형 교육이라는 판타지

2. 신기루 속에서 헤매는 교육

3. 대학의 무능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대학의 무능이다. 여기서 무능이란 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생산하지 못한다거나 지나치게 기업친화적인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학의 학사구조를 떠받들고 있는 ‘학문’의 가치에 대한 무능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전공과 일자리의 미스매치에 대한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현재 일자리에서 하고 있는 일의 내용이 자신의 전공과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교육학과 사회교육을 전공하고 작년 한 해 동안 컨설팅 회사에서 일을 했다. 이건 미스매치일까? 대학전공 수업을 통해 습득한 지식과 직결되는 업무, 즉 우리 과의 어떤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바로 이 업무를 할 수 있겠다 싶은 것들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했던 일의 내용이 나의 전공과 상당히 맞는 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직무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실무 기술은 입사 후에 일을 하며 배울 수밖에 없다. 재무제표 보는 법은 굳이 한 학기 내내 강의를 듣지 않아도 관련 업무를 맡으면 훨씬 짧은 시간 내에 익힐 수 있다. 어차피 업종과 회사에 따라 재무제표를 활용하는 방식도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를 모두 파악해서 미리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기업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인재’를 대학이 키워내라는 것은 몇몇 전문기술직을 제외하면 애초에 무리한 요구이다.


대학에서 키울 수 있는 것은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전공)과 방법론, 그리고 관점이다. 나는 사회교사나 기업교육 담당자가 되지 않았지만 강의에서 배운 방법론과 관점을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활용했다. 인문학은 논리적 접근과 문제를 해결하는 상상력에, 사회과학은 자료를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 전공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업무에 필요한 참고자료들을 파악하는 것은 유사한 과정이며 기업에서 단시간에 습득하기 어려운 자기성찰, 관계 맺기(협업), 기획 능력 등은 대학 강의실 안팎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채울 수 있다. 고도로 전문화된 직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노동현장은 대학 전공과 1:1로 대응하는 지식이나 능력보다는 이렇게 일반적인 삶의 기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모든 직업을 대학 전공과 매칭시켜서 분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미스매치’는 문제라기보다는 필연에 가깝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내용이 나의 전공과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전공과 일자리의 미스매치를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학습경험을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얼마나 연결시켜 사고하고 있는지 묻는 것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의 학습경험이 지금의 자신과 갖는 연결고리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 문제를 두고 학생들에게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구조를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대학이 전문지식을 공부하는 경험의 가치를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용평가를 받을 정도로 기업화된 미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졸업생들이 학과에 많은 금액을 기부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업무에 그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하는 정부 관료들과 굳이 공조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그들의 교육관이 우리의 교육관과 꽤 잘 맞는 부유한 졸업생들을 찾으면 그만이다. 대체로 그들은, 다른 분야는 어땠는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학부 시절 인문교양 교육만큼은 사랑했던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정신의 삶the life of mind’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이 ‘정신의 삶’을 즐기기를 희원한다.

- 마사 누스바움,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214~215쪽


반면에 한국의 대학은 학생들에게 경제적 자원으로 환원할 수 있는 ‘쓸모’ 외에 한 사람의 시민이자 노동자로서 내가 어떤 수업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학에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경험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하는 졸업장뿐이다. 몇 년 넘는 시간과 비싼 등록금을 ‘투자’한 졸업장이 ‘불량주식’이 되어 ‘수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면 대학교육의 낭비를 운운하는 게 꼭 틀린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기루가 걷히고, 교육부가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중단하면 지금 대학의 학사구조개편이 가지는 문제점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는 돈이나 정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프랭크 도너휴는 《최후의 교수들》에서 “인문학 교수들은 기업식 문화가 대학에 침투해서 자신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일일이 관리하려는 모습에 분통을 터뜨”리지만 “학생들에게 줄 더 우월한 것이 우리 인문학자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금 대학은 상품가치 외에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영영 기업에 종속된 기관이라는 이름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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