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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ul 26. 2017

 4차 산업혁명과 대학 #2

신기루 속에서 헤매는 교육

2017년 7월 21일. <오늘의 교육> 39호.


글 순서

1. 사회수요맞춤형 교육이라는 판타지

2. 신기루 속에서 헤매는 교육

3. 대학의 무능


교육부의 대학구조개혁 홍보영상


신기루 속에서 헤매는 교육


그럼에도 대학들은 ‘미래 예측’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헤매고 있다. 특히 2016년 초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구호가 제기되고, 알파고 충격이 더해지면서 대학들은 너도나도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할 수 있는 학과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작년 4월 프라임 사업에 지원한 대학들의 학과 신설계획에는 소프트웨어, 사물인터넷 등 ICT 계열 전공 인원을 늘리겠다는 내용이 대거 포함됐다. 한림대학교는 프라임 사업과 관계없이 아예 4차 산업혁명 전공을 신설하기까지 했다.


한림대학교의 '4차 산업혁명' 전공 역량트랙


4차 산업혁명, 보다 폭넓게 ‘융합’이라는 구호는 구체화되지 못한 채 선언 수준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학사구조 개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육부의 주요 재정지원 사업 중 하나인 ‘학부교육 선도대학 육성사업(ACE)’도 융합이 점령했다. ACE 사업 참여대학 중 ‘교육과정 구성 및 운영개선 분야’의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된 서울시립대는 ‘통섭전공’을 운영하고 있다. 예컨대 ‘도시문화컨텐츠학’의 경우, 영어영문학과의 주관으로 국사학과, 도시사회학과, 조경학과 등 총 9개 학과의 참여로 교육과정이 운영된다. 정해진 졸업학점을 1개, 혹은 2개 학과(복수전공/부전공)에서 채우던 방식을 9개 학과에서 듣는 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융합형 인재’가 탄생하는지도 의문이지만, 대체 도시문화컨텐츠라는 분야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다.


서울시립대 통섭전공 운영 현황 (출처: 교육부)


인문학 역량을 강화하겠다며 시행 중인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도 온통 ‘융합’으로 도배됐다. 코어 사업은 ① 인문기반융합 모델, ② 글로벌 지역학 모델, ③ 기초학문심화 모델, ④ 기초교양대학 모델, ⑤ 대학 자체 모델의 5개 유형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 참여대학 19개 중에 14개가 인문기반융합 모델+@를 채택하고 있다. 인문기반융합 모델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초학문의 증진보다는 새로운 전공을 만들거나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유형이다. 코어 사업 홈페이지에서는 각 대학에서 펼쳐지는 ‘융합의 향연’을 엿볼 수 있다. 전남대학교는 방학을 맞아 ‘하계 인문기반 융합전공 적응 예비프로그램(ICT)’을 개최한다. 목적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4차 산업혁명(자동화)의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해 인문대 학생들의 ICT 기술 및 기초 디자인 능력을 함양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인 JAVA를 익히는 것이 인문역량 강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업계획서 상의 강변만 있을 뿐이다.


전남대학교 코어사업단 '인문기반 융합전공' 운영개요


대학들이 4차 산업혁명과 융합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헤매는 동안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 몫으로 돌아온다. 전공이 없어지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교육과정 개발은 교수들의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추겠다, 급변하는 사회에 대비하겠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겠다며 학과 구조조정이 이뤄지거나 교육과정 개발 주기가 짧아지면 교수들이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줄어든다. 진득하게 연구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이 이뤄지기는커녕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용정보원과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5월 직업진로교육 강화 협약을 체결했다.


대학뿐만 아니라 초중등교육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 일자리 몇 천개가 없어진다더라, 지금의 자녀 세대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더라는 전망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 과정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도입된 코딩 교육은 사교육 시장의 배만 불릴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으며, 진로교육은 일회성 직업체험과 미래 유망직종 탐방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일자리가 금세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과 직업 중심의 진로교육이 강화되는 정책은 모순이다. 지금의 진로교육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향성 없이, 다시 말해 나침반 없이 ‘미래의 불안’이라는 신기루로 뒤덮인 사막을 헤매고 있는 꼴이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작년 이맘때 발간된 《오늘의 교육 33호》는 ‘인공 지능 시대 앞에 선 교육’을 다뤘다. 정용주는 “학교 제도가 이상에 대한 완전하고 견고한 합의의 산물이 아닌 정치적 반대 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누군가는 학교에 ‘기업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노동자’를 요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할 ‘시민’을 요구한다. 현실에서는 시민이 노동자고 노동자가 시민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으로 “견고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어느 쪽의 입장이든 학교의 구조가 영원히 바뀌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4차 산업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대학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이 교육의 다양성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등장한 이후 대학의 건물, 입학정원, 교육과정과 같은 자원들이 IT·융복합 관련 학과에 집중되고 있다. 전공과 일자리의 미스매치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의 낭비를 운운하지만, 오히려 지금의 IT 쏠림현상이야말로 낭비에 가깝다. 민간 씽크탱크 여시재의 이원재 기획이사는 미래 일자리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의 각광받는 기술을 관리하는 테크놀로지 엘리트,
그 소수의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사례로 제시되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드론, 커넥티드 카 등의 첨단기술은 종사자가 많다고 해서 발전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아니다. 기술발전에 따라 만들어진 상품을 생산하는 제조업,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서비스업이야말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IT 관련 학과를 졸업하면 그 전문지식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게 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고 학사구조를 개편하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 앞서 한국고용정보원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했듯이 어떤 산업이 뜨고, 어떤 산업이 질 것이라는 예측이 들어맞기 어렵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https://sites.psu.edu/deconstruction/2015/09/15/assumptions/


대학의 ‘인기분야’에 대한 쏠림현상은 사실 오래된 문제다. 2008년 중앙대를 두산그룹이 인수한 뒤 이사장이 된 박용성 회장은 “대학 졸업생이면 재무제표는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2009년부터 회계수업을 신입생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이공계는 물론 의약 계열과 예체능 계열에도 회계수업을 강제한 것이다. 재무제표를 읽을 줄 아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의약계열 종사자들이 한자를 잘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손해 보지는 않는다. 철학을 전공한 학생이 자동차의 작동 메커니즘을 공부한다고 사회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많이 아는 건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늘어날수록 ‘다른 배움’을 조직할 여유가 줄어든다.


우리는 훌륭한 과학·기술 교육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며, 나는 국가들이 이 분야를 향상시키는 노력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제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그와 똑같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는 다른 능력들이 지금 경쟁적 혼돈 속에서 소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 마사 누스바움,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30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기업과 경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꼭 나쁜 일로 보기 어렵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긍정하거나, 기본 전제로 삼고 있는 학문뿐만 아니라 비판하는 학문 역시 공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스템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상상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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