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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Dec 31. 2020

[2020x넷플릭스]
인간수업, 그리고 n번방

인간수업·페이드 포

#2020년을 돌아보며 떠오른 몇 가지 장면들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와 함께 소개하고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덧붙입니다.




욕망은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살인의 이유다. 돈에 대한, 사람 또는 애정에 대한, 권력에 대한 욕망. 인정받거나 과시하고 싶은 욕망. 한 사회가 이런 욕망을 얼마나 당연한 것 내지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는 것이다. - 김세정 <트와일라잇 살인자들>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행동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어떤 욕망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욕망을 우리는 ‘범행동기’라고 부른다. 올해 4월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수업>은 바로 이렇게 타인을 파괴하는 욕망을 다룬다. 


NETFLIX


성적은 1등급,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성실한 학생 오지수. 교실에선 인싸라기보단 아싸고 소위 ‘일진’으로부터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흔한 범생이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는 그의 비밀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 조건만남 성매매를 중개하는 포주라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던 그의 이중생활을 알게되는 건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은 ‘핵인싸’ 배규리다. 그런데 배규리는 그의 범죄사실을 알아낸 뒤에도 신고를 하거나, 그만두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제안하는 건 ‘동업’이다.


울며겨자먹기로 배규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오지수, 두 사람의 동업은 잘 굴러가나 싶더니 역시 같은 학교에 다니며 두 사람의 성매매 사업에 성판매 여성으로 참여하는 서민희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급기야 사람 죽이는 게 별 일도 아닌 조폭까지 개입하기 시작하고, 서민희와 사귀던 학교 일진 남학생도 이 세 사람으로부터 비밀의 기운을 감지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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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련의 과정에서 도무지 보이지 않는 건 두 가지. 첫 번째는 죄책감이다. 오지수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배규리는 강압적인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성매매 사업을 운영한다. 이들에게 폭력적인 성구매 남성으로 인해 성판매 여성들이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은 ‘사업적 리스크’ 혹은 ‘그 여성들의 선택에 따른 책임’일 뿐이다. 문자 그대로 살인적인 입시경쟁과 낙오되면 죽는다는 불안감, 혹은 미래에 대한 압박 때문에 오지수와 배규리에게 다른 사람의 존엄을 고려할 여유 따위는 없다는 식이다.


또 한 가지 보이지 않는 건 믿을 수 있는 어른, 혹은 사회적 시스템이다. 오지수의 아버지는 구제할 수 없는 도박중독,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탈출’했는지 보이질 않는다. 배규리의 부모는 스카이캐슬의 부모들 저리가라 하는 수준으로 딸의 숨통을 죄는 성과주의자들이다. 그나마 옳은 말을 좀 한다 싶은 선생님은 이들의 비밀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며, 정의감에 타오르는 경찰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발씩 늦는다. 그나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어른, ‘경호업자’ 이 실장은 스스로가 또 다른 폭력과 악의 집행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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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이른바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범죄자들은 성착취 피해자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피해자들은 저 더 가학적으로 괴롭힐수록, 신상을 많이 공개할수록 좀 더 많은 수익을 벌어다주는 돈벌이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 범죄를 세상에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도 경찰로 대변되는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두 사람의 청년 추적단 ‘불꽃’이었다. 행정부의 경찰만 문제였을까? 국회와 법원도 마찬가지, 이제 나아지고는 있지만 사건 초창기만 해도 우리 사회가 가진 법으로는 이 n번방 범죄자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인간수업>을 두고 n번방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곱씹어야 할 점들을 보여줬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비교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선 동의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과연 성범죄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바람직했는지는 의문이다. 서민희를 통해 피해자의 고통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오지수와 배규리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출은 이른바 '가해자 서사'의 문제를 담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범인이 목사를 지망하던 신학생이었다느니, n번방의 주범 박사 조주빈이 대학에서 어떤 생활을 했다느니 등등 대부분의 언론이 범죄를 다룰 때 가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추듯이, <인간수업>도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심리를 부각시킨다. 오지수와 배규리가 너무 '안쓰러워' 보이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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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작진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었을 것이다. 청소년 범죄에 대한 별도의 유튜브 콘텐츠를 올리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담아내는 장면 역시 여성의 눈으로 봤을 때 불편하지 않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흥미로운’ 가해자의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아쉬울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됐다. 만약 시즌2가 나온다면, 그리고 오지수와 배규리가 다시 등장한다면, 이들의 서사를 통해 어떤 메시지가 전달될 것인가, 어떻게 ‘좋은 의도’로부터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인가, 조금 더 고민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레이철 모랜 <페이드 포>


<인간수업>에 등장하는 성판매 여성들은 철저히 자기 선택에 의해 성판매를 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실제로 ‘성매매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성매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페이드 포>는 저자 레이챌 모랜이 15살부터 7년간 성판매 여성으로 일한 경험과 그 이후의 삶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성매매는 좋아서 하는 걸까, 주도권은 어차피 여성들이 가지는 거 아닌가, 합법화가 오히려 필요한 것 아닌가, 이런 반응을 두고 저자는 ‘신화’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성매매는 자신의 몸이 성적으로 학대되도록 돈을 받고 허락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 상황을 ‘수용’했기에(선택이 아니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발화조차 할 수 없도록 스스로에게 재갈을 물리게 된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대를 숨기고 내면화해야 하는 상황도 학대다” 


성욕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라는 사실이 어째서 성매매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이 책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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