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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Dec 31. 2020

[2020x넷플릭스] 친절한 욕쟁이,
보건교사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최후의 라이오니

#2020년을 돌아보며 떠오른 몇 가지 장면들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와 함께 소개하고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덧붙입니다




어렸을 적 보건실, 아니 양호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한 소독약 냄새다. 치과는 무서워하고 소아과도 가기 싫어했던 나는 양호실도 최대한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왁스칠한 나무복도에 미끄러져 무릎이 까졌을 때,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찾아간 양호실은 따뜻하다기보단 차가워보였다. 양호선생님은 색깔도 냄새도 묘하게 피와 비슷하고, 바르면 따끔하기까지 한 소독약을 들고 나를 쳐다봤다. 이미 아픈데 저걸 바르면 더 아프겠지, 하는 두려움에 찡그린 나를 보고 양호선생님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에구 아팠겠네, 잠깐 이거 바르면 따끔한데, 잘 참으면 선생님이 상 줄게” 따끔하다기 보단 정말 아팠지만 그 뒤에 받아먹은 ‘까까’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선생님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양호실의 공기는 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양호실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불상부터 무당이 쓸법한 온갖 신기에 묘하게 어울리는 컬러 비비탄 총알, 그리고 오색찬란한 장난감 칼까지. 이경미 감독이 만들어낸 ‘정말 이상한 세계’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다정한 미소는커녕 찡그린 표정이 아닐 때를 찾기 어렵고, 시도때도 없이 찰진 발음으로 “씨X”을 연발하는 욕쟁이다. 


아니 보건교사면 간호사고,
간호사면 백의의 천사여야 하는데
대체 왜 이러세요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의 삶을 돌아보면 “씨X” 정도는 양반이다. 안은영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욕망의 덩어리들, 특히 사람의 몸만큼이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나쁜 기운(=젤리)’들과 매일 같이 사투를 벌인다. 학교에서 아픈 학생 돌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사람분의 일을 하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을 텐데 안은영은 투잡을 뛰는 셈이다. 


NETFLIX


심지어 본업에도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다. 학교에서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학생들에게 심폐소생술 교육이 필요하다며 교실을 돌아다닌다. 안은영이 몸이 90도로 꺾일 정도로 힘겹게 심폐소생술 실습용 더미인형을 운반하는 장면은 그녀가 지고 있는 책임감의 무게를 보여준다. 자기도 너무 힘들지만 내가 교사니까, 보건교사니까 학생들에게 이건 해줘야 한다는 그 책임감. 이 욕쟁이 보건교사는 정말 지나치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NETFLIX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몸은 축나가고, 엄청난 스트레스까지 겹겹이 쌓여있는 일상을 안은영이 버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0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안은영들에게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바로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일선 현장의 의료진들이다. 입고 벗는데 몇십분씩 걸리고 무게도 3kg에 달하는 방호복을 입은 채, 침을 뱉는다거나 욕설을 한다거나 성추행까지 해대는 일부 몰지각한 환자들과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가장 감염 위험이 높은 현장에서 오늘도 몇 시간씩 일하는 의료진.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나 와서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또 무엇보다, 사람은 살려야겠기에. 오늘도 수많은 의료진이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안은영의 책임감도 비슷하지 않을까. 젤리는 내 눈에만 보이고, 내가 지금 이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원인모를 아픔에 시달릴 것이다. 이 학생들을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면, 따뜻한 기운을 전한다면 지금 넘어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능성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텐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지금 나밖에 없다. 그러니 비록 “씨X”이 터져나오는 일상이지만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그 마음. 나는 그게 나이와 상관없이 가질 수 있는 ‘어른’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NETFLIX


그래서 나는 이 욕쟁이 보건교사가 너무나도 친절하게 느껴진다. 무릎이 까진 자리에 따끔한 소독약을 바르고 ‘까까’를 쥐어줬던 어린 날 그 양호선생님의 미소와 모양새는 참 다르지만, 담겨있는 마음은 마찬가지로 따뜻하다. 홀로 지내던 안은영 주위에 인표와 여러 학생들이 모여들어 점점 보건실이 북적댄 이유도, 그 온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함께 보면 좋은 작품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자신이 망가져가는 상황에서까지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버티는 책임감은 숭고하다. 그런데 그런 책임감을 꼭 사람만이 질 수 있는 걸까? 코로나19 시대에 SF 작가들의 상상력을 담아낸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에 실린 김초엽 작가의 단편 <최후의 라이오니>에는 ‘셀’이라는 이름의 기계가 나온다. 셀은 오래 전, 기계들과도 교감을 나누던 ‘라이오니’라는 인물이 남긴 약속을 기억한다. 그래서 라이오니가 돌아올 때까지 무너져가는 공간의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해 스스로가 고장나고 망가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버틴다. 그리고 어느 날, 라이오니와 닮은 인물이 그 공간에 도착했을 때, 과연 셀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 단편은 멸망해가는 공간에 도착하는 ‘나’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다만 김초엽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절망 가운데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용감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 어쩌면 김초엽 작가 역시 코로나19 의료진들을 생각하며 셀이라는 기계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용기는 친절한 욕쟁이 안은영에게도 꼭 들어맞는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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