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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Dec 31. 2020

[2020x넷플릭스]
나의 (사랑하는) 문어 선생님

나의 문어 선생님·앞으로 올 사랑

#2020년을 돌아보며 떠오른 몇 가지 장면들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와 함께 소개하고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덧붙입니다.




어떤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원래 타이밍이라지만 급작스럽게 환경이나 내면이 변화함으로써, 그전에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되고,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나의 문어 선생님> 역시 특별한 시기에 만난, 특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감독 크레이그 포스터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어느 날,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세상과, 또 사람과 마주하는 것조차도 너무 힘들 정도로 지쳤다는 걸 깨닫는다. 그가 자신을 돌보기 위해 찾아간 곳은 아프리카의 한 바닷가. 산소통도 잠수복도 없이, 그는 문자 그대로 차가운 바닷물에 자신을 내던진다. 낯설고 아름다운 그 공간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아니 그가 사랑에 빠진 건 알록달록한 물고기도 예쁘게 반짝이는 조개도 아닌, 문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첫 눈에 반한다’는 말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엔 ‘관심’부터 시작한다. 왠지 모르게 눈을 끄는, 자꾸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그런 매력을 느끼는 것이 사랑의 첫 단계. 포스터와 문어의 첫 만남도 마찬가지다. 포스터는 여느 때처럼 바다 밑바닥을 헤매다가 조개껍데기가 여럿 뭉쳐있는,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규칙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예쁜 것들을 모아둔 듯한 물체를 발견한다. 조심스레 살펴보니 그 안에는 문어가 있다. 천적인 상어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는지, 사냥감인 게를 잡기 위해 위장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문어는 디자인 감각에서나 두뇌회전에서나 고수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NETFLIX


이렇게 포스터의 눈을 잡아끄는 문어, 이제 보고 싶고 알고 싶은 단계의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바로, 교감. 나홀로 짝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내가 내민 손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문어와 인간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포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그저 계속 찾아가고 손을 내미는 일뿐이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문어는 예의 ‘두뇌 플레이’로 조개껍질을 방패삼아 다가오더니, 급기야는 다리를 뻗어 크레이그의 손을 잡는다(!)


한 번의 접촉이 일어난 뒤, 두 사람의 움직임은 거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커플을 방불케 한다. 포스터의 손을 여러 개의 다리로 감아올리며 함께 바다 속을 헤엄치고, 때로는 거의 수면까지 따라오기도 한다. 


NETFLIX


마치 허니문 시기를 보내듯, 즐거운 움직임을 나누던 두 사람은 포스터의 실수로 잠깐 헤어질(?) 위기도 겪지만 이내 다시 만나 관계를 회복한다. 이렇게 연애의 생로병사를 다 겪은 듯한 둘 사이에 더 나아갈 사랑의 단계가 있을까?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진 <헤드윅>의 명곡 ‘사랑의 기원’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 서린 그 아픔이,
바로 내 영혼의 아픔과 같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어느 날 문어는 천적인 상어의 습격을 받아 다리 한쪽을 뜯기고 만다. 처음에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상어를 쫓아버릴까도 했던 포스터는 바다 생태계의 규칙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다리가 뜯긴 채 힘없이 자신의 굴속으로 돌아가는 문어를 보며, 포스터는 마치 자신의 팔다리가 뜯긴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아마도, 삶에 지쳐 세상에 지쳐 아프리카 바닷가를 찾았던 포스터 자신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괴로움 속에 며칠 뒤 다시 만난 문어. 놀랍게도 다리가 잘려나간 자리에는 아주 조그만 작은 다리가 자라있다. 마치 어떤 식물의 줄기가 꺾인 자리에 새싹이 돋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몇 달이 흐르자 그 다리는 온전히 자라나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포스터의 삶에 대한 고뇌와 문어의 삶은 거의 완벽하게 겹쳐진다. 인생의 고비를 맞아 쫓기듯 아프리카 바닷가로 흘러온 포스터에게 새롭게 돋아나 자라난 문어의 다리는 그 자체로 희망의 상징이 된다. 


NETFLIX


그리고 벌어지는 문어와 상어의 재전투(!), 승리의 환희, 이어지는 관계, 그리고 피할 수 없었던 이별과 포스터가 문어와의 관계에서 배운 것, 그로부터 다른 존재에게 이어지는 사랑까지.. 그 뒤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꼭 넷플릭스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무엇보다 이 다큐멘터리는 사랑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도 특별한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사랑. 만약에 포스터가 삶의 고비를 맞지 않았다면, 맞았더라도 아프리카의 바닷가가 아니라 다른 곳을 찾았다면, 매일 같이 바다에 잠수하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었던 사랑. 하지만, 포스터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일깨워줬던 사랑.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순간은 언제일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정혜윤 <앞으로 올 사랑>


코로나 시대에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만나서 함께 밥 한끼, 술 한잔도 할 수 없고, 마스크가 얼굴의 반을 덮고 있으니 표정을 통한 소통도 불가능에 가깝다. 비말을 차단해야 한다고 하니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호기심이나 매력을 느끼기도, 교감으로 나아가기도 어렵다. 그래도 우리에겐 사랑할 방법이 하나 남아있다. 이야기를 통해 다른 존재의 고통이 나의 고통과 같음을 느끼는 것이다.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에는 그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을 풀어낸 열 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지금 우리의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사랑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고릴라에 대한 사랑, 화학약품에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 대한 사랑, 가축에 대한 사랑, 박쥐에 대한 사랑, 우리가 이미 잊어가고 있는, 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단어들에 대한 사랑 등등. 코로나19는 인수공통, 즉 인간과 동물이 함께 짊어진 바이러스다. 저자는 마찬가지로 인수공통 감염병이었던 흑사병 시대의 사랑을 담은 <데카메론>에서 영감을 얻어 열 개의 사랑 이야기를 써냈다. 이 사랑 이야기는 지금 읽어야만 한다. 대체 우리가 코로나19 시대가 아니라면, 언제 박쥐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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