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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4. 2017

교육불가능과 평생교육 #1

평생교육 담론과 학교의 교육불가능

글 순서


1. 평생교육 담론과 학교의 교육불가능

2. 교육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

3. (평생)교육이 불가능한 시대

4. 함께 교육불가능의 시대를 질문하기



대학원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잠시 쉬다가 다시 같은 전공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하겠지 싶었는데 인생은 역시나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우연의 연속인지라 어째 마음은 점점 공부에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교육에 관련된 텍스트를 읽거나 쓸 때면 ‘평생교육’이라는 우산 아래 서있는 스스로를 확인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교육과 관련된 텍스트를 아주 많이 읽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꾸준히 읽는 텍스트라면 격월간으로 출간되는 《오늘의 교육》 정도이다. 아마 《오늘의 교육》이나 교육공동체 벗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교육 불가능 담론은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 통용된 ‘학교 붕괴’ 혹은 ‘교실 붕괴’ 담론 이후, 교육운동 진영에서 그나마 폭넓게 수용된, 문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무리의 교사, 연구자, 시민들이 오늘날 한국의 학교 교육에 대하여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 아이를 맡기지 않을수록 아이가 덜 고통 받는다는 것, 학교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성장시켜 주기는커녕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상처를 유발하는 숙주가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교육희망’이라는 기만적인 수사 말고 ‘교육 불가능’이라는 한계선상에서 우리 교육을 바라보자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사실 말이지만, 지금 학교가 존립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국가는 거둔 세금을 써야 하고, 교사는 월급을 받아야 하며, 학생은 졸업장을 받아야 하고, 부모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 이계삼 <교육 불가능의 시대> 한겨레 신문 칼럼(2012.1.5.)


이 정도면 한국사회에 던지는 일갈, 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2011년 ~ 2012년까지 이어진 교육 불가능 담론의 초기 끗발(?)이 언제부턴가 정체돼있다는 것이다. 시리즈로 나오는 영화는 1편이 제일 재밌고, 어지간한 가수들은 데뷔 앨범 이상의 퀄리티로 후속 앨범을 뽑아내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원래 그런 거라며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적어도 나는 교육 불가능 담론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교육이라는 현상을, 교육 실제라고 이름 붙여진 현실을 들여다볼 때 거치는 필터인 ‘평생교육’ 담론과 ‘교육 불가능’ 담론의 관계를 다뤄보기로 했다. 



평생교육 담론과 학교의 교육 불가능


나에게 평생교육 담론의 의미를 짧게 표현하라면 가르침과 배움의 경험에 대한 민주화의 움직임이라 답할 것이다. 평생교육의 우산 아래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연령·계급·젠더·기타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교육의 주체들이 다양한 공간과 시간에 걸쳐 경험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양상을 ‘가시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일을 굳이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교육≒학교]라는 관념이 한국 사회에 지배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생교육은 문자 그대로 ‘평생’에 걸친 가르침과 배움을 다루기 위해 개념적으로 내부에 학교교육을 포괄하고자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학교교육에 대한 안티테제”(한숭희, 양은아, 2007, 평생교육 맥락에서의 인문학습의 새 지평: 인문학 위기론의 재해석)로 자리매김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과 평생교육 담론은 만난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 서문에는 평생교육 연구자라면 인상 깊게 읽을 만한 구절이 있다.


물론 교육 불가능한 학교에도 아이들은 있고,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학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토에서 아이들끼리 혹은 교사와 아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사례를 들어 여전히 학교 안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낡은 체제를 유지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평생교육의 기본 가정 역시 “학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토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만들어낸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교육 불가능 담론의 학교체제 비판에 담긴 문제의식은 평생교육 담론 내부에서 구체적인 연구대상의 차이만을 품은 채 반복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교육의 입장에서 학교는 사회에 필요하지만 이론적으로나 정책상으로나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견고한 요새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학교가 덩그러니 동떨어져 흉물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에 평생교육 담론 내부에서 ‘학교 교육 중심성’을 비판하거나, 개별 연구가 가지는 함의를 학교교육의 한계에 비추어 강조하기 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학교에 대고 ‘교육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결국 평생교육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만날 했던 소리”에 가까운, 하나마나 한 얘기일 수 있다.


그렇다고 교육 불가능 담론과 평생교육 담론의 핵심은 결국 같다! We are the World! 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양 담론의 비교·분석에서 함의를 찾기 위해서는 학교라는 ‘교육 문제의 블랙홀’을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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