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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4. 2017

교육불가능과 평생교육 #2

교육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

글 순서


1. 평생교육 담론과 학교의 교육불가능

2. 교육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

3. (평생)교육이 불가능한 시대

4. 함께 교육불가능의 시대를 질문하기



교육 불가능의 ‘시대’, 평생교육의 ‘시대’


교육 불가능 담론의 경계는 격월간 《오늘의 교육》의 초창기 기획들을 모아 출간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통해 그려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 주목하면, 우리는 교육 불가능이 학교라는 제도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겨냥한 담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혁규 교수는 교육 불가능 담론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기존 한국사회의 교육문제 비판과 큰 차이가 없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교육 불가능의 시대》가 이런 기존의 문제 제기에서 핵심적으로 나아가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졸업을 해도 취직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냉엄한 현실을 언급한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학벌주의에 기반한 의미 없는 공부로부터 탈피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혁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오늘의 교육》 17호.


이 역시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큰 흐름 안에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육 불가능’이라는 명명을 통해 우리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가능성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가르침과 배움을 통한 성장이 가지는 의미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학교만을 철저하게 분석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보면 교육 불가능 담론이 학교라는 제도만을 문제시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공부하는 과정이 공동의 용기를 생산하는 과정이 아니라 개인적 고립과 비겁만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정치적 위기이다. 그러나 이 위기는 대학만의 위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당대의 위기를 공유하고 있는 위기로서 대학의 위기를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 전체가 비겁해진 것은 아닌가?
 
- 엄기호 <카이스트의 유령들> 《교육 불가능의 시대》


하지만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을 둘러싼 논의 지형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은 사실상 학교교육의 문제와 위기에 대한 비판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교육 담론을 생산하고 퍼뜨리는 주체의 대다수가 공간적으로는 학교, 시간적으로는 학령기 안팎에 위치한 (대안)학교 교사, (청소년)인권 활동가, (학교)교육 연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시대 담론으로서 등장한 교육 불가능 담론이 점차 확산되는 과정에서 학교에 대한 비판만이 부각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육 불가능 담론을 다시 사유할 때 필요한 관점은 시대 담론으로서 교육 불가능 담론이 가지는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교육의 문제를 학교라는 시공간 안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둘러싼 이 사회, 이 시대를 분석함으로써 어째서 교육이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교육 불가능 담론이 평생교육 담론과 교차하는 지점 역시 바로 이 ‘시대’가 아닐까 한다.


어느 교육 담론이 안 그렇겠냐마는 평생교육 담론 역시 시대의 맥락에 발 딛고 있다. 인간은 그 존재 이래로 평생에 걸쳐 가르치고 배워왔지만, 평생교육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견고한 산업자본주의의 구조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유동적인 지식경제사회로 탈바꿈한 이후로 볼 수 있다. 지식경제사회의 도래 이후, 사회 구성원들은 과거처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평생에 걸쳐 노동자로서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대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지속적으로 재교육을 받지 않으면 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직업능력개발이 평생교육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냉전기를 넘어 민주주의 정신이 전파되고 시민사회가 성숙해감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교양교육의 움직임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대의 평생교육 담론은 크게 ①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직업능력개발과 ②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두 갈래의 움직임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평생교육 내부의 스펙트럼이 넓다고 경탄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 아니라 뿌리부터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평생교육 연구자인 나윤경은 “평생교육이 기술주의와 인문주의의 두 축을 계속 고수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적이거나 불가능한 꿈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희망을 탑재한 채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 표류의 방향은 평생교육이 “‘자격’과 ‘스펙’ 중심의 인적자원개발로 구성되고 상상”(나윤경, 2013, 평생교육의 오래된 새 길: 전환학습적 인문학으로의 선회)되는 무거운 현실이다. 과연 이 냉혹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 평생교육의 가능성을 낙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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