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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4. 2017

리얼리티쇼의 탈을 쓴 다큐멘터리

SBS 교양 파일럿 <인생게임 - 상속자> 리뷰


대선주자들이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표현을 공식 TV토론회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제 수저계급론은 우리 사회 담론지형에서 나름의 지분을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방송사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읽을 수 있다. 특히 SBS는 작년 여름에 방영된 파일럿 프로그램 <인생게임 - 상속자>에 이어 SBS 스페셜 <수저와 사다리> 3부작을 통해 수저계급론의 문제의식을 다룬 바 있다. 이 글에서는 교양 프로그램으로서 <인생게임 - 상속자>가 가지는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인생게임 - 상속자>의 핵심 포맷


<인생게임 - 상속자>는 리얼리티 쇼를 표방한다. 이를 위해 일반인 참가자들을 모집했고, (아마도) 연출이나 각본 없이 주어진 룰에 따라 발생하는 장면들을 그대로 촬영했을 것이다. 포맷의 핵심은 "일반인 참가자들이 고립된 환경에서 설계된 계급사회를 체험하며 벌이는 리얼리티쇼"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참가자들은 4단계(상속자, 집사, 정규직, 비정규직)의 계급을 가지고 있다. 계급에 따라 식사, 주거, 편의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다르다. 상속자는 모든 자원에 가격을 매긴다. 집사는 상속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좌하지만 자원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상속자가 책정한 가격을 내고 자원을 이용해야 한다. 계급사회의 면모가 엿보이는 조건이다. 



세부적인 룰로 들어가면 계급에 따른 불평등은 보다 심화된다. 참가자들은 공동미션을 통해 자원을 구입하는데 필요한 코인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미션에 성공했을 때, 보상으로 제시되는 코인을 가장 먼저 가져가는 것은 미션에 대한 기여도와 관계없이 상속자이다. 계급 순으로 코인을 나누다 보니 가장 낮은 계급, 비정규직은 열심히 미션을 수행하고도 전혀 코인을 가져가지 못한다. 룰을 통해 현실에서 비정규직이 처한 부조리와 설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당하기만 하는 건 재미가 없다. 게임이 진행되는 4일동안, 매일 아침 계급을 바꿀 수 있는 선거가 치러진다. 계급이 낮을수록 인원이 많으니 참가자들이 잘만 연대하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마지막 4일째 되는 날, 가장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가 우승을 차지하며, 우승자에게는 상금(비트코인) 천만 원이 주어진다. 



이게 왜 재밌을까?


<인생게임 - 상속자>는 당시 방영된 파일럿 중에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비록 정규편성 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반응만 보면 충분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일반인 참가자들의 행동과 발언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생생하게 담아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생생한 메시지 위로 내레이션과 자막을 활용해 제작진이 의도가 무리없이 전달된다. 또한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인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를 노골적으로 짚어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대중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인생게임 - 상속자>가 <그것이 알고싶다>류의 시사고발프로그램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예능적 요소의 활용이다. <인생게임 - 상속자>는 계급의 전복이나 비정규적인 자원 취득이 가능한 변칙적인 룰을 통해 쇼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시청자들은 계급별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내일은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까?'라는 궁금증을 떠올린다. 일반인이지만 각자 독특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참가자들도 중요한 경쟁력이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10명의 참가자들 중에 누군가 한 명에게는 스스로를 투영해보지 않았을까?



쇼를 던졌지만 다큐로 받아보겠습니다


이렇게 포맷의 측면에서, 그리고 참가자들의 개인적 역량을 통해 <인생게임 - 상속자>는 상당히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편성이 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먼저, 리얼리티 쇼의 성격상 프로그램의 지속가능성은 일반인 참가자들의 행동양식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에 달렸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한다고 해서 첫 참가자들이 보여준 것 이상의 다양한 모습이 나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인생 게임을 지향하지만 사적 인간관계의 축적, 정치사회적 변동 등 현실에서 삶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요소들을 게임에 반영하기 어렵다. 표면적인 두뇌싸움의 형태로 흘러가게 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더 지니어스> 류의 쇼양 프로그램에 비해 경쟁력은 약하고, 돈은 훨씬 많이 드는 애물단지가 될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인생게임 - 상속자>가 애초에 정규편성을 노리고 만든 파일럿인지 의문이 든다. 나에게 이 프로그램은 레귤러 리얼리티쇼라기 보다는 [샤샤샤]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룰에 따라 현실의 배경은 잊으라고 하지만, [샤샤샤]는 [강남베이글]과 완전히 다른 현실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 ‘가상게임’에 임하는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참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참가자는 [제갈길]이 기득권에 대한 저항을 강경하게 표현했을 때, 그에게 “인간미가 없다”며 연대의 마음을 버렸다. 반면에 멘사 회원이자 만화가 출신인 참가자는 자신의 자원을 [제갈길]에게 몰아주었다. 이렇게 게임의 결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선택들은 참가자들이 인생게임이 벌어지는 저택 바깥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좌우된다. 


최종 결과도 마찬가지다. [강남베이글]의 우승은 계산적이지 않은, 모종의 ‘인간성’이 불러온 승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1) 게임에서 우승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는 처지(엄청난 부자), 2) 첫 계급 선정에서 ‘우연히’ 기득권 이너써클에 들어갈 수 있었던 행운, 3) [샤샤샤]가 다른 참가자들에게 우승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 상황 등등 제작진이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 언급해주었으면 좋을만한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성찰을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은 여운을 남기거나 해석의 장을 연다기 보다는 비겁한 것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정규직 이상 계급의 동맹이 비정규직의 동맹보다 빠르게, 강고하게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계급 하락에 대한 불안감이 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보다 강하다는 명제는 이미 여러 층위의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교양 프로그램으로서 이러한 현실을 좀 더 명확하게 반영하는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표면상 사회비판적인 외피를 쓰고 정작 구체적인 메시지는 던지지 않을 것인가, 사이에서 <인생게임 - 상속자>는 후자를 선택했다. 가벼운 쇼양을 지향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미 다큐라고 보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선택이었다. 다행이 그 아쉬움은 몇 달 뒤에 방영된 SBS 스페셜 <수저와 사다리> 3부작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수저와 사다리>에 대해서도 다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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