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88> 리뷰
<응답하라 1988(응팔)>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198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라는 시대적 배경을 통해 소환하는 복고 코드로 잔재미를 살리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들을 활용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마지막으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는, 다시 말해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복고 코드의 활용은 <응답하라 1997>부터 쭉 이어져 온 전략이다. 다만 전작들이 90년대를 다룸으로써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의 추억을 소환했다면, <응팔>은 19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내세우면서 보다 폭넓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버스, 거리 등의 풍경뿐만 아니라 마이마이와 같은 디테일한 소품들이 이야기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덕분에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시에 자신의 추억을 돌아보는 이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응팔>이 시리즈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TV 콘텐츠를 본방으로 소비하는 중장년층을 타겟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응팔>은 전작들에 비해 부모 세대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룬다. 덕분에 이야기의 폭은 넓어졌고, 보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힘 있고, 밀도 있는 전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은 드라마의 문법이라기보다는 시트콤의 문법이다. 일반적으로 시트콤은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중심으로 작은 에피소드를 구성하고, 굉장히 많은 에피소드를 쌓아가며 천천히 인물들의 성장, 로맨스 등 일종의 주제를 전개시킨다. 반면 드라마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밀도 있게 담아내며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렇게 보면 <응팔>은 드라마의 외형을 뒤집어 쓴 시트콤에 가깝다. 매 회차마다 흥미로운 디테일을 배치하고, 등장인물 각각에 부여된 특성을 살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다룸으로써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에 남는 메시지가 납작해지는 것이다.
굳이 <응팔>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찾는다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존재인 가족은 소중하다” 정도일 것이다. <응팔>에서 그리는 쌍문동 골목길의 네 가족은 매일 같이 투닥거리고, 항상 서로가 채워주지 못하는 결핍을 안고 산다는 점에서 외형상 완벽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평소에 보라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덕선이도 보라의 결혼식에서는 애틋한 마음에 눈물짓고, 무뚝뚝해도 너무 무뚝뚝한 아들인 정환이는 엄마가 가족들에게 서운해 하거나, 무언가 난처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어김없이 나서서 엄마 마음의 빈 칸을 채운다. 극 중에서 어떤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가족의 정(情)을 동원해 해결하는 방식이 반복되다 보니 매 회차마다 기승전결은 있지만 시청자가 그 과정에서 아무런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다. 그나마 전작까지는 로맨스의 긴장감이 살아있었다. 하지만 응팔에서 로맨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덕선이는 ‘자기를 좋아하는 친구를 좋아하게 되는’ 수동성과 ‘챙겨주다가 사랑에 빠지는’ 모성 판타지를 부여받는다. 로맨스뿐만이 아니다. 택이와 정환이가 덕선이를 동시에 좋아하지만 그들의 우정을 뒤흔드는 갈등은 발생하지 않는다. 1화에서와 최종화 사이에 특별히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도 없다. 드라마로서 담아낼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는 없고, 돌아보면 남는 것은 ‘기-승-전-가족’의 가족뿐이다.
<응팔>에서 가족은 지나칠 정도로 미화된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보다는 ‘가족에 대한 헌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빠 꿈이 뭐냐?”는 덕선의 질문에 동일은 “너그들(자식들)이 아빠 꿈”이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뭘 하고 싶냐 고민하기보다는 부모의 기대에서 어긋나지 않는 길을 택하고, 부모와 갈등이 발생했을 때는 ‘지금까지 실망시킨 적 없잖아요’는 전략을 구사한다. 동성동본이라는 황당할 정도로 긴장감 없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들을 선우와 보라는 '믿어 달라' 한 마디로 설득한다. 1988년의 시대적 상황은 30여년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지만, ‘가족’이라는 제도는 지금도 건재하다. 청년도 부모들도 자신의 꿈을 찾아 노력하기 어려운 시대에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가치’를 설파하는 것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응팔>은 정작 이야기보다는 그 등장배경과 그에 대한 반응이 보다 중요한 작품일 수도 있다. <응팔> 같은 작품이 제작되고, 또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사회 구성원들이 강요받는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는 안온함과,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작진은 각자도생의 살풍경이 펼쳐지는 2010년대 헬조선에 굳이 또다른 갈등과 긴장의 이야기를 제시하기 보다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각자도생’이라 할 때 그 ‘각자’의 최소단위로 볼 수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그러한 판타지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응팔>은 매우 성공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의 결핍을, 그리고 이 시대의 정서를 포착해내는 솜씨만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결핍과 정서를 조금 더 울림이 있는 방식으로 풀어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만약 <응답하라> 시리즈가 또 제작된다면, 다음 작품은 과거의 이야기와 현대 사회를 연결 짓는 문제의식의 고리가 좀 더 탄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