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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y 08. 2017

언시생 논술 #1

논제: 사실, 진실, 팩트폭력, 탈진실

언시를 막 시작했던 무렵,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언시생 백일장에 제출했던 글.
논술이라기 보단 에세이에 가깝다.
당연히 좋은 평가는 못받았음 -_-ㅋ


헌정 사상 최초로 치러지는 장미대선의 열기가 뜨겁다. 이번 대선이 지난 대선들과 다른 점 하나는 언론사마다 후보자들의 발언을 검증하는 팩트체크에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전 세계적인 가짜 뉴스(fake-news)의 범람과 무관하지 않다. 작년에는 특히 브렉시트, 미국 대선 등 중요한 선거에서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오죽하면 옥스퍼드 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하기까지 했다. 탈진실 시대에는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신념에 호소하는 거짓말이 여론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팩트체크는 이런 문제를 막아보겠다는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팩트체크만으로 충분할지 의문이다. 



가짜 뉴스는 신념을 지키는 것이 사실 확인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력을 발휘한다. 이들에게 신념을 위협할 수 있는 팩트는 불편하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우연찮게도 ‘팩트폭력’이라는 신조어에 부합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교과서로만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한민족이 평화를 사랑하고 수호해왔다는 신념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그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한국군이 현지 민간인들에게 자행한 범죄를 알려줄 경우(팩트), 그들이 가지고 있던 평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국 정부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갈지도 모른다(고통). 이런 점에서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여성학자 정희진) 


상처를 피하는 것은 본능이다. 가짜 뉴스는 이러한 본능에 기대어 힘을 발휘한다. 반면 팩트는 불편한 진실을 들이민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치부를 들추거나, 다 해결된 줄 알고 외면하던 사회적 참사를 환기해 죄의식을 자극한다. 그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팩트와 관계없이 자신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서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들이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이것이 팩트다”라고 말하는 것은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애초에 팩트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팩트체크로 사실을 말했으니 소임을 다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언론의 자위에 불과하다. 


'그들'은 진실한 언론의 수용자가 될 수 없는걸까?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주는 인지적 상처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들이 아무 정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언론은 제 기능을 상실할 것이고, 민주주의 사회의 합리적 의사결정은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기꺼이 끌어안을 줄 아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보다 근본적인 돌파구이다. 따라서 가짜 뉴스의 시대에 언론이 당면한 과제는 빠르게 팩트를 체크하고, 그 팩트를 전달할 방법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언론은 어떤 관점으로 어떤 내용의 뉴스를 제시할 때, 언론수용자들을 합리적인 유권자로 길러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팩트체크는 물론, 지금도 언론사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뉴스들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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