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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日동맹'의 추억…바짝 붙은 아베·메이

英·日동맹'의 추억…바짝 붙은 아베·메이




日, 미·중 틈새 새 활로 찾기
英, 유럽 밖 새 우방 필요
 브렉시트 이후 협력 모색







< 두 섬나라의 ‘밀월’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왼쪽)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1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양자회담을 하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양국 간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두 정상이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밝게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유럽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와 만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양국 간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아베 총리는 영국이 미래 관계에 대한 아무런 합의 없이 유럽연합(EU)을 떠나는 ‘노 딜(no  deal) 브렉시트’에 대한 반대 의사도 밝혔다. 양국이 최근 부쩍 가까워지면서 ‘제2의 영·일 동맹’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아베 총리는 10일(현지시간) 런던에서  메이 총리와 회담한 뒤 기자들과 만나 “영국은 유럽 시장 접근을 위한 중요한 관문”이라며 브렉시트 이후에도 영국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노 딜’ 브렉시트를 반대하고 있다”며 “메이 총리가 마련한 브렉시트 합의안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메이 총리는 “브렉시트는 영국과 일본의 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날 회담에서 두 정상은 바이오, 빅데이터, 인공지능(AI), 친환경 등 다양한 산업에 대한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해군 군함을 동아시아에 파견해 대북 제재 집행을 돕기로 하는 등 안보 협력도 논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고립주의 노선을 취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약해질 위기에 처한 일본이 영국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오랜 우방인 영국과 관계를 강화해 간접적으로 미·일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일본과 협력할 필요성이 커지기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브렉시트가 마무리되면 유럽으로부터 고립될 위험이 있어 유럽 밖에서 새로운 우방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EU  탈퇴 후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일본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은 그동안 영국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참여를 요청해 왔다. CPTPP는 일본을 포함한 11개국이 참여하는 다자무역협정이다. 메이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CPTPP 참여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일본은 영국에 대한 투자도 늘리고 있다. 지난해 양국 간 경제 교류 규모는 40조원을 넘어섰고, 1000개가 넘는 일본 기업이 영국에 진출해 15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9011166281







영일동맹을 하던 1902년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세계최강의 영국과 신흥강국 러시아가 그레이트게임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영국은 그 난리를 쳤던가?




원래 파트너는 조선이었다.


조선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1500만 정도로 인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중국의 리홍장을 시켜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주었던 것이다.


영국, 미국과 협력하여 러시아를 몰아 내라고 말이다.


그런데 조선을 팔아먹은 고종은 이런 국제관계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종은 그렇게 붙지 말라는 러시아랑 붙어서 조러밀약을 2차례나 하고 결국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까지 뛰쳐 들어간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조선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영국의 의도는 완전히 깨졌다.




그렇다면 러시아를 막으려면 파트너가 있어야 했다.




그때 마침 중국에서는 1899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난다.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은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의화단의 난이라고도 하며 1900년, 즉 경자년(庚子年)에 일어난 교난이라는 의미로 경자교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나 ‘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운동을 ‘의화단의 난,’ ‘권비의 난,’ ‘단비의 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산둥 지역에서는 일찍이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됐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중국북경이 함락하고 북경에 있는 미국, 영국, 독일 등이 있는 공사관이 포위를 의화단으로부터 당하게 되었다.


그 때 다급한 영국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의화단 일망타진에 나선다.




이때 가장 적극적인 것이 일본이었는데 연합군 2만 명 중에 일본이 제일 많은 9000명이나 파견하였고 영국이 특히 마음에 들어했던 연합군 지휘권 문제로 러시아랑 대립이 있었는데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다시 내주었던 일본이 영국의 편을 들어줬던 것이다.




결국 의화단을 토벌하고 영국은 일본이 마음에 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영국은 영일동맹을 맻으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에 큰 힘이 되었다.


물론 국제관계에 있어서 영국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조선은 당시 세계최강의 영국의 눈밖에 나면서 파트너인 일본의 조선지배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해 줬던 것이다.




조선은 이러한 구한말의 세계적인 역학관계를 전혀 궤뚫지 못하고 세계최강의 눈밖에 났고 신흥국편에 서면서 나라 잃고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결국은 분단이 되는 영일동맹의 단초가 끼워졌던 것이다.




지금의 영일동맹도 의미가 있다.


왜 이렇게 이들이 뭉쳤을까 하는 점이다.


그때는 러시아가 신흥국이지만 이제는 중국이 신흥국이다.


그때는 최강국이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미국이 최강국이다.




영,일이 뭉쳐서 중국을 배척하고 미국과 연대할까?


아니면 반대일까?


당연히 전자다.


약삭 빠른 이들이 그것을 모를리 없다.




한국은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멍청한 선택을 통해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아니면 이번 기회를 통일을 넘어 만주까지 수복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가?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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