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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환가치는 무엇인가?

나의 교환가치는 무엇인가?


세계는 산업혁명이후 발전했다.


산업혁명(産業 革命, 영어: Industrial Revolution)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약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manufacturing process)으로의 전환, 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 경제 등의 큰 변화를 일컫는다. 섬유산업은 현대의 생산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산업 혁명은 후에 전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산업 혁명이란 용어는 1844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아널드 토인비가 1884년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에서 이를 보다 구체화 하였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이전에는 발전을 하지 못했는가?




출처 : http://www.mssresearch.org/?q=node/581


세계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GDP가 늘지 않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난 약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시작된 제1차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전세계의 부(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어떠했는가?

그전에는 농업시대였고 풍년이 든 몇 해간 사람이 늘고 국가의 부도 늘었다가 다시 흉년이나 대기근이 들면 그대로 다시 고꾸라져 인구와 부가 동시에 감소했다.

그래서 저 그래프와 같이 일정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저렇게 폭발적인 부와 인구의 증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생산성 향상이 있었는가?

바로 아담스미스가 얘기하는 분업 때문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작업으로 핀을 만든다면 하루에 몇 개정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핀제조과정을  18개 공정으로 나누어 열명이 분업을 하면 하루에 4만 8천 개의 핀을 만들 수 있고 한명이 하루에 4천 8백 개의 핀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한 달에는 무려 십사만개의 핀을 팔 수 있게 된다.


즉 분업을 통해 엄청난 생산성 향상을 얻게 되며 멜서스 트랩에서 인류는 빠져 나오게 된다.


맬서스 트랩의 이론적 근거는 수확 체감 법칙. 한정된 토지에 노동력을 증가시켜도 현재 농업 기술[2]로는 토지 당 단위 생산물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구는 정체된다는 것이다. 즉, 인류의 식량은 1, 2, 3, 4 식으로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류는 1, 2, 4, 8, 16 등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인류가 커다란 재앙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에 그러한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자국의 엄청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대항해 시대를 통해 개척한 세계의 식민지와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 간다.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 당시 동양은 교환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많았는데 주로 차, 향신료와 비단, 금, 은 등이다.


서양은 자신이 방적기, 방직기를 돌려 얻어낸 모직물과 이러한 동양의 차, 향신료, 비단, 금, 은 등을 교환하여 세계적인 부를 늘려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조선은 세계적인 분업에서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었을까?


개뿔이나 아무 것도 없었다.

일단 조선은 실크로드로 상징되던 세계 교역로에서 외곽에 위치해 있어서 중간에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었다.

예를들어 교환할 것이 없었다면 지나가던 낙타 등 상단의 잠자리를 제공하고 음식을 팔던 숙박업도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교환할 가치가 있는 물품조차 변변치 않았다.

인조 때 벨테브레가 표류하고 효종 때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규슈의 나가사키로 가다가 배가 난파되어서 제주도에 들어온 것이지 한국을 목표로 해서 온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즉 조선이 쇄국을 통해 조선이 무역을 거부한 것이 아닌 조선은 아예 줄 것이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 때 영정조 때 일본과 청과의 중개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쌓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일본이 직접 자신들이 필요한 차, 비단, 인삼, 목화 등 재배에 성공을 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들여오던 도자기는 임진왜란을 통해 도공을 데려오면서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어서 서양과의 교역에 나설 수 있었다.

게다가 막대한 은광에서 나오는 은을 수출하여 국가의 부를 늘릴 수 있었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과의 교역을 끊었고 조선은 타의에 의해 강제 쇄국의 길로 들어선다.


일본은 300년전부터 조총이나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며 선진문명으로 앞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일본의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을 침략하고 1910년 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을 병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무역소외는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동인이 없었다.

그래서 망국의 길로 갔다.

그리고 서양과 교역할 것이 많았던 일본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세계는 지금 WTO를 통해 더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만약 다른 나라에 줄 것이 없는 국가는 여성을 가정부로 팔고 남성은 노예와 같은 노동자로 팔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며 거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부가가치가 높은 물건을 팔 수 있는 나라는 거지 나라의 국민들을 노동자로 부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지금 사회에서 개인도 마찬가지로 무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남에게 나의 부가가치를 팔 수 있는 개인은 자유로운 자유인이 되며 남에게 아무런 가치를 팔 수 없다면 가난한 노예가 된다.


가문에서 쌓아놓은 부가 없다면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것만이 자유인이 되는 길이다.


특히 청년은 일을 통해서 개인의 가치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인 학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학력은 자신이 머리가 좋으니 앞으로 이 기업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미래의 교환가치인 셈이다.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끊임없는 자기개발을 통해 자신의 가치나 성과를 남에게 보여주는 방법 밖에는 없다.


내가 남과 차별되는 나만의 교환가치는 무엇인가?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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