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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60년 고깃집… 의자도 없고 불평도 없다

                                                                            

[Why] 60년 고깃집… 의자도 없고 불평도 없다


[전현석 기자의 觸(촉)] 12세부터 고기 구워… '원조 서서갈비' 연남서식당 이대현 사장

“아홉번 이사할때도 연탄불 안 꺼… 저녁 7시면 고기 동나”

모두가 서서 먹는 집
6·25부터 드럼통에 연탄불 피워… 이젠 서서 먹는 게 전통 됐죠
효자·효녀 대동하고 온 어르신들, 의자 대신 소주 박스 드려요

아버지와 대폿집으로 시작
소주·막걸리에 소갈비는 안주로… 학교도 못 가고 '술강아지' 노릇
1970년대 들어서야 장사 좀 됐죠
식당 싫어서 뛰쳐나온 적도…

1년 매출은 30억
장사 잘되는 비결이요? 첫번째 철칙은 ‘정직’
혼자 온 손님 잘 챙기고 계산기 두드리지 말자

작년에 간판 교체
나 따라하는 사람들이 ‘서서 먹는 갈비’ 특허 내
예전 간판업자 수소문… 원래 느낌 나게 바꾼 것

자식한텐 안 물려줘요
여행도 자유롭게 못 가… 운동도 마음대로 못 해…
내일 문 닫는다고 해도 부끄럽지않게 살아야죠

          

서울 노고산동 연남서식당은 1953년 문을 열었다. 의자 없이 서서 먹는 고깃집 원조다. 이 집엔 의자 말고도 없는 게 많다. 밥과 찌개 같은 부대 메뉴가 없다. 메뉴는 소갈비뿐이다. 여기에 고추, 마늘, 고추장, 고기 찍어 먹는 소스만 내 놓는다. 그런데도 개점 시간인 낮 12시 전부터 식당 앞에 길게 줄이 선다. 다른 고깃집들이 첫 손님 받을 시간인 오후 6~7시쯤 고기가 동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중국·싱가포르·홍콩·대만 등 아시아 관광객들 명소다. 2년 전 영국 BBC에서 한국 대표 식당으로 소개했고 작년 12월에는 미국 LA의 한 방송사에서도 촬영해 갔다. 부친에 이어 2대째 이 집을 운영 중인 이대현(76)씨는 1953년 식당이 문 열었을 때 열두 살이었다. 그때부터 일해 온 식당이 60년 넘게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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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일본의 한 방송국에 나온 연남서식당 모습.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언론에서도 한국의 대표 맛집으로 소개했다. / 이대현 제공

         

자식과 함께 온 부모만 앉을 수 있어

지난 27일 오후 3시 월요일 낮인데도 식당은 손님으로 꽉 찼다. 한국어와 영어·중국어·일본어가 떠들썩했다. 식당 창문 모두 열고 대형 환풍기가 있는데도 달착지근한 고기 굽는 냄새와 자욱한 연기가 식당 가득했다.

―다리 아프고 옷에 냄새 밴다고 불평하는 손님도 있겠군요.

"글쎄요. 그런 사람 별로 없어요."

―서서 먹는 걸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고집이라기보다…. 6·25 때부터 드럼통에 연탄불 피워 놓고 그렇게 장사했는데, 이제는 신식 아이디어가 됐지요. 드럼통에 의자 놓는다고 제대로 못 앉아요. 다리가 뜨거운 드럼통에 닿으니까. 몸을 옆으로 틀어서 먹어야 해. 그러다 바지 탈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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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고산동 연남서식당 이대현(76) 사장은 1953년 열두 살 때부터 이 식당에서 일했다. “1970년대엔 이 드럼통 하나에 3, 4팀이 들러붙어서 고기 구워 먹었어요. 10여 명이 서로 남인데도 고기 나눠 먹었죠. 참 정감 있고, 참 장사 재밌었을 때죠.” / 오종찬 기자

         

―이 식당에서 목발 짚고 먹는 사람 사진도 인터넷에 떠돌던데요. 간이의자라도 마련해 놓으면 좋지 않을까요.

"의자 하나만 갖다 놔 봐. 나도 달라고 모두 우르르 아우성일 거야.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준다고 욕하고. 대신 의자 가지고 와서 먹는 사람은 안 말려요."

―이 식당에선 모두 평등하군요.

"앉아서 먹게 도와주는 손님이 있긴 있죠. 나이 들어서 거동이 힘든데도 효자·효녀 대동하고 온 손님. 이분들한테는 소주 박스 옆으로 세우고 위에 신문지 깔아 드려요. 어르신들이 자녀한테 고기 받아먹는 모습이 제비 둥지에서 새끼가 어미한테 먹이 받아먹는 것 같아. 그렇게 맛있게 잡수세요. 용돈 5만원, 10만원보다 이런 데 와서 고기 한 점 주는 자식들이 더 예쁜 거야."

―이 집에서 고기 먹어 본 사람들이 다른 고깃집보다 살코기가 많다고 하던데요.

"다른 집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고. 우리는 30근(18㎏)짜리 고기 사오면 기름하고 잡뼈 11근(7㎏) 버려요. 나는 고기 가지고 장난 안 쳐요. 1970년대부터 고기 연하게 하는 약을 썼다는데, 촌놈이라서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다른 데는 소갈비에 본드로 고기 붙이는데 우리는 그런 거 안 써요. 칼로 갈비에 붙어 있는 살에 구멍을 내서 토시살을 끼워넣지. 그러니까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하루에 손질할 수 있는 고기 양이 갈비 600에서 800대 정도예요."

―당일 오전에 양념한 고기만 판다고요.

"고기를 하루나 이틀 양념에 재면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고기가 검게 절어요. 이러면 갈비를 먹는 게 아니라 양념을 먹는 거지. 가공식품이 되는 거야. 우리는 양념을 했어도 간장색이 아니라 붉은 빛깔이 나지요. 고기 맛을 최대한 살리려고 그래요." 계산대 옆에는 '소갈비 1대 150g ₩15,000. 국내산 육우뼈 갈비에 미국산 토시살을 섞음'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자세하게 써 놨네요.

"사실 그대로죠. 저는 양념도 다 공개했어요. 파, 으깬 마늘, 볶은 통깨, 참기름, 후춧가루, 설탕, 진간장 딱 7가지에 끓이지 않은 생수를 써요. 저는 응큼한 거 싫어요."

―미국산 쓴다고 손님들이 뭐라 안 하나요.

"한우는 좁은 외양간에서 사료 먹고 자랐고, 미국산은 넓은 목장에서 풀 먹고 자랐는데 어떤 소가 더 건강하겠어요?"

―자신 있으시군요.

"이런데도 잘 되느냐 이거지?(웃음) 나는 대한민국 전 국민에게 고기 팔겠다는 욕심 없어요. 100만명 바라보고 장사하지. 나는 손님한테든 종업원한테든 구걸 안 해. 6·25 때 배고파서 구걸한 이후 내 인생 사전에서 더 이상 구걸은 없다. 왜? 내가 떳떳하고 내가 파는 고기가 자신 있으니까. 떳떳하면, 자신 있으면 구걸할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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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 사장은 거의 매일 오전 6~7시쯤 출근해 연탄불을 직접 간다. / 전현석 기자

         

6·25 땐 잔술에 고기 팔아

이씨는 이날 오전 6시 30분 식당에 출근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서 고양이 세수하고 출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제일 먼저 연탄불부터 갈았다.

―왜 숯불이 아니라 연탄불을 씁니까.

"고기 구울 때는 불이 세야 해. 그래야 살 속에 국물, 그러니까 육즙이 끓어요. 불이 시시하면 육즙이 끓지 않고 말라요. 고기가 질겨지지. 숯은 처음 30분만 좋아요. 그 뒤에는 재가 생겨서 2㎜ 정도 두께로 숯을 덮고 화력이 약해져. 옛날 양반들이 안심이나 등심을 화롯불에 두세 번 구워 먹을 때나 숯불이 좋지. 연탄은 480에서 500도 불이 22개 구멍을 통해 일정하게 올라오니까 고기 구울 때 아주 좋지요."

―밤새 장사는 안 해도 연탄불은 계속 피우는군요.

"꺼뜨리면 다음 날 장사 못하니까. 식당 이사할 때도 연탄불 계속 살려왔지. 우리 식당은 60년 넘게 장사하고 이사도 아홉 번 다녔지만 연탄불 꺼뜨린 적 거의 없어요.

이씨 할아버지는 김포에서 이름난 지주였다고 한다. 일제 시대 김포 땅을 팔고 신촌으로 이사 왔다. “원래 여기가 산골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기와집 짓고 마포에서 조랑말 스무 필로 운송 사업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이씨 큰아버지가 사업하다 망했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이씨 부친은 밭에서 채소를 키워 시장에 팔러 다녔다고 한다. 이씨가 아홉 살 때 6·25가 터졌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죽고 아버지와 이씨, 남동생만 살아남았다. “피란 가서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다섯 살 여동생이 죽어 있더라고. 배고파서였는지, 병에 걸렸는지 몰라. 남의 밭에다 묻고 오는데 그새 세 살 먹은 여동생이 또 죽어 있더라고. 또 묻었지. 얼마 후 어머니도 폭격으로 떠나셨어. 사람 목숨이 정말 벌레 목숨 같았어.”

이씨 아버지는 이씨를 데리고 대폿집을 시작했다. 논밭에 굴러다니는 미군 드럼통 3개를 구해다 집 마당에 놓고 그 위에 야전 천막을 쳤다. 김포약주와 소주, 막걸리를 잔술로 팔고, 안주로 돼지고기와 소갈비를 팔았다고 한다.

―학교는 안 다녔나요.

“월사금 못 내서 중 2 때 포기했어요. 하루 쌀 세 홉 벌기 위해서 술집 했으니까. 한 홉(180mL)이 어린아이 먹는 우유 한 팩 양도 안 돼. 그걸로 미음 끓여서 세 식구가 겨우 한 끼니 때웠어요. 지금은 사라진 연세대 앞 신촌양조장 가서 술 만들고 남은 재강(술지게미) 훔쳐 먹고 취하고. 석탄 저장소 있던 서강역에 갱목 들어오면 부엌칼 가지고 가서 껍질 깐 뒤에 미끈미끈한 속을 가져다가 쪄 먹기도 했지.”

―동생도 같이 일했나요.

“동생은 어리니까 나만 일했지요. 술집에서 시중드는 아이를 술강아지라고 했는데 내가 그랬지. 아버지한테 일 못한다고 맞고. 다른 애들은 학교 다니는데, 나는 양조장 가서 술 사오는 게 얼마나 서럽던지. 또 조금 먹고살 만해지니까 아버지가 계모를 들였어요. 계모한테 미움 많이 받았지요. 아버지는 또 낮 12시쯤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져요. 그러면 장사는 거의 혼자서 해야 하는 거야.” 이씨 부친은 장가를 다섯 번 갔다고 한다.

―가출할 생각도 했겠군요.

“내가 어디 설렁탕 집이라도 가서 일하면 밥 잘 먹고 월급 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요. 그런데 아버지하고 남동생이 불쌍해질 것 같아서 집 못 나갔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어요. 아버지가 빨리 부자가 돼야 내가 해방이 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니까 돈이 모이던가요.

“아니야. 손님 대부분이 농사꾼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신촌이 거의 다 논밭이었으니까. 봄부터 외상술 마시고 추수 끝나면 준다는데 받은 적이 거의 없어요.”

―그럼 언제부터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나요.

“6·25 복구 사업으로 논밭에 한옥이 들어서기 시작했어요. 신촌로터리에 목재소와 철물점이 들어섰고. 그때는 목수들이 왕인데, 시간 없으니까 술 한 잔 먹고 고기 한 점 먹고 갔어요. 또 신촌이 버스 정류장 종점이었는데, 운전사들도 많이 사줬지. 우리 집에서 술 한잔하고 다시 운전하러 가는 거야.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지요.”

이씨 대폿집은 할아버지 고향을 따서 ‘김포집’, 안주는 실비(원가)에 먹고 술값만 더 내면 된다고 해서 ‘실비집’ 등으로 불렸다. 1970년대 초까지 소갈비보다 술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씨는 “1973년 유류 파동 이후 돈 버는 사람이 늘면서 술보다 갈비가 더 잘 팔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자가용이 많아지니까 운전해야 한다고 술 덜 먹고 고기만 찾아요. 그때부터 온 가족이 다 덤벼서 갈비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이씨는 장사가 어느 정도 되자 식당을 뛰쳐나와 제지 회사에 취직했다.

―왜 나왔나요.

“지금도 그렇지만 식당 하면 우습게 봤어요. 술만 먹으면 그렇게 시비를 걸고, 나보다 나이 한참 어린데도 반말을 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제지 회사 있다가 아예 사장도 했죠. 화장지 공장, 두루마리 공장, 전기밥솥 공장, 알루미늄 주물 공장도 했고. 동대문 종합상가에서 이불 장사, 청량리 도매상가에서 장갑 장사도 했고, 나중에는 빵 장사도 했어요. 가게는 큰아들인 제 앞으로 돼 있었지만, 식당은 배다른 동생들이 했죠. 그러다 1989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다시 가게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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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남서식당은 서서 먹는 갈비의 원조집이다. / 오종찬 기자

         

10중 7만 갖겠다는 인생철학

이씨집 간판은 작년 ‘연남서서먹는 갈비집’에서 ‘연남서식당’으로 바뀌었다. “원래 김포집으로 허가가 났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1979년 식당을 내 이름으로 등록했는데 공무원이 내가 마포구 연남동 산다고 ‘연남식당’이라고 한 거야. 그래도 사람들이 우리 집을 서서갈비라고 부르니까 연남서서먹는 갈비집이라고 간판을 달았는데, 나를 따라 한 집들이 먼저 서서 먹는 갈비를 특허 내서 나는 못 쓴대. 고발도 들어오고. 그래서 바꿨지.”

―옛날 간판하고 많이 비슷하군요.

“전에 간판 만들었던 사람 수소문해서 만들었지요.”

―원래 느낌 그대로 살리려고 했군요.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의리지. 저는 채소 장수든 고기 장수든 한 번 거래하면 오래 해요. 나한테 장난치지 않는 이상 바꾸질 않지. 채소 시세를 알아보고 그러지도 않아요. 믿으니까.”

―손해 볼 수도 있을 텐데요.

“내 인생철학이 ‘칠삼’이에요. 내 것이 10이라고 해도 7을 가지고 3을 상대방에게 줘야 된다는 겁니다. 가끔 갈비 몇 대 덜 먹었다고 속이고, 냉장고에서 몰래 소주 꺼내 먹는 손님 있어요. 알지만 모른 척해요. 그 정도는 손해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손님 기분 좋아서 다시 올 거 아녜요?”

―장사 비결이 이건가요.

“장사 잘되는 비결은 딴 거 없어요. 첫째, 정직해라. 식당 하는 사람들이 욕먹는 게 캄푸라치(거짓)를 많이 해서 그래요. 행주 대신 소매로 슥 닦고 깨끗한 척하고 그러지 말라는 거지. 둘째, 혼자 오는 손님한테 잘하라. 식당 가면 혼자 왔다고 저 구석에 앉게 해. 그러면 다신 안 오지. 그 사람한테 잘하면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 데리고 와. 셋째, 사장이 손님 보는데 계산대에서 계산기 두드리지 말아라. 손님 정떨어져요.”

연남서식당 직원은 현재 14명이다. 직원 점심과 저녁밥을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2층에는 직원 휴게소, 샤워실을 뒀다. 월급도 다른 곳보다 더 준다고 한다.

―직원들 대우도 좋다고요.

“식당 주인은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마지막에 퇴근해야 해요. 직원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직원이 제대로 장사하도록 도와주는 거죠. 하루 종일 있을 필요도 없어요. 아침에 연탄불 갈고 집에 있다가 저녁에는 같이 청소하러 나와요. 자동차 경주로 따지면 직원이 운전사고 주인은 타이어 갈아주고 연료 넣어주는 정비사죠. 주인이 게으름 피우면 자동차가 어떻게 되겠어요?” 연남서식당 1년 매출은 약 3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장사했으니 돈 많이 벌었겠군요.

“아니요. 지금은 혼자 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하고 같이 장사해서 다 나눠 가졌어요. 또 박리다매라서 많이 못 남겨요. 지금 갈비 1대에 1만5000원인데, 2008년에 1만4000원이었다가 2015년에 1000원 더 올린 거예요. 이 가게 땅하고 사는 아파트, 또 혹시 여기 개발되면 식당 옮겨야 할지 몰라서 사 놓은 땅하고, 은행에 세금 내려고 모아 둔 예금이 전부예요. 땅 사고 건물 사서 돈 벌려고 하지 않았어요.”

―체인점을 내지 않는다고요.

“체인점은 사기성이 있어요. 퇴직금 먹으려고 노리는 곳이 많아요. 진짜 잘 되는 곳은 본점들이 가지고 있고요. 나는 그렇게는 장사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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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은 낮 12시부터 소갈비 구워 먹으러 온 사람들로 붐빈다. 오후 6~7시쯤이면 그날 준비한 고기가 다 팔린다고 한다. / 오종찬 기자

          

오늘을 사는 게 역사를 쌓는 것

이씨는 “요새 고민이 많다”고 했다. “더 이상 도라무통(드럼통) 구할 데가 없어요. 30년 넘게 쓰고 있는 것도 있고, 제일 새것이 10년 전에 구한 거예요. 지금 연탄은 경기도 시흥 공장에서 받는데, 충북 음성으로 옮긴대요.” 현재 연남서식당 드럼통 22개 중 19개는 연탄, 나머지 3개는 인공 숯을 쓰고 있다. 연탄을 못 쓰게 될 때를 대비해서다.

―자식들에게 식당 물려주기 힘들겠네요.

“아니요. 저는 식당 안 물려줄 겁니다. 여행도 자유롭게 못 다니고 운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누가 저보러 골프 치자는데, 식당 조그마한 거 하는 놈이 골프 친다고, 짚신 신고 양복 입었다고 얼마나 흉보겠어요?”

―그럼 언제까지 장사하려고요.

“모르죠. 내 몸이 버틸 때까지? 한 10년 더 하려나. 나는 그냥 오늘만 생각하고 살고 싶어요. 오늘을 사는 게 역사를 쌓는 거다, 그게 제 신조예요. 내일을 생각하는 사 람은 뻥이 센 거죠. 기약만 하지 실천은 안 하거든. 내일 문 닫는다고 해도 오늘까지는 깨끗하게 해놓고 마무리하자. 오늘의 책임을 다하자. 정직하게, 부지런하게 살자. 그거면 된 거죠.”

이씨와 4시간 넘게 선 채로 인터뷰를 했다. 가게를 나와 지하철을 타자 몸에서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서서 먹는 고깃집 사장과 만나고 오는 길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31/2017033101908.html

언제 여기 가본다 하고 안 못 가본다.


―체인점을 내지 않는다고요.
“체인점은 사기성이 있어요. 퇴직금 먹으려고 노리는 곳이 많아요. 진짜 잘 되는 곳은 본점들이 가지고 있고요. 나는 그렇게는 장사 안 해요.”


상가도 분양할 때 알짜배기는 분양팀에서 다 가져가고 안 될 곳만 분양 한다.

그래서 상가 분양 받을 때 돈을 더 주고 제일 좋은 자리 받으면 그것 때문에 수익률 안 나온다.

일본의 프랜차이즈는 한국과 다르다.

오래 된 프랜차이즈라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5개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프랜차이즈를 하려면 한국처럼 그냥 교육 대충 받고 프랜차이즈를 무한대로 늘리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자기만의 장사철학을 가지고 장사를 잘 하시는 것 같다.


“내 인생철학이 ‘칠삼’이에요. 내 것이 10이라고 해도 7을 가지고 3을 상대방에게 줘야 된다는 겁니다. 가끔 갈비 몇 대 덜 먹었다고 속이고, 냉장고에서 몰래 소주 꺼내 먹는 손님 있어요. 알지만 모른 척해요. 그 정도는 손해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손님 기분 좋아서 다시 올 거 아녜요?”


어렸을 적 교회를 잠깐 다닌적이 있다.

그중 교회 목사님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자와 하나님이 있다는 신자 사이의 설전을 얘기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자가 얘기했다.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있다면 내 눈앞에 보여줘봐"

그러자 신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 하늘의 태양을 봐"

무신론자는 눈이 부셔서 태양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러자 신자가 얘기한다.

"하나님이 만든 태양도 제대로 못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려고 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사님 말씀이다.

그 사람과 말싸움은 이겼지만 그래서 그 사람을 인도했는가? 였다.


서서갈비 사장님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훔쳐먹고 속여먹는 손님이 있을 것이다.

왜 없겠는가?

다만 그 사람 무안 주면 다른 사람이 보고 따라는 안 하겠고 그 사람도 그 집에 안 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얻는 게 무엇인가? 라고 보는 것 같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누군가는 이익을 본 것이고 그것은 누군가가 빚을 졌다는 뜻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장사가 잘 된다.

이것이 장사의 기본이다.


아는 세무사님이 있다.

전화로 상담이 와도 모르는 번호로 와도 대답 잘 해준다고 한다.

그럼 이것저것 다 대답해준다고 한다.

그럼 상담만하고 안 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니 그 사람은 안 와도 다른 사람 소개시켜준다고 한다.


손님이 나갈 때 반드시 다시오는 집이 있다고 한다.

'아니 이래서 주인이 남겠어?' 라는 집은 꼭 다시 온다고 한다.


장사 잘 되는 기사식당이 있는데 그 집의 비법을 공개하겠다.

계란 후라이를 무한리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먹고 싶은만큼 먹어도 된다.

눈치보고 안 먹어도 된다.

그냥 집어먹어도 된다.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이 7개까지 먹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자기 친구들을 가장 많이 데려 왔다고 한다.

계란후라이 무한리필 사장 빌딩 올렸다고 한다.


“장사 잘되는 비결은 딴 거 없어요. 첫째, 정직해라. 식당 하는 사람들이 욕먹는 게 캄푸라치(거짓)를 많이 해서 그래요. 행주 대신 소매로 슥 닦고 깨끗한 척하고 그러지 말라는 거지. 둘째, 혼자 오는 손님한테 잘하라. 식당 가면 혼자 왔다고 저 구석에 앉게 해. 그러면 다신 안 오지. 그 사람한테 잘하면 얼마 있다가 여러 사람 데리고 와. 셋째, 사장이 손님 보는데 계산대에서 계산기 두드리지 말아라. 손님 정떨어져요.”


손님의 마음을 어찌 저리 잘 알까?

입장 바꿔 생각하는 마음이 몸에 밴 사람 같다.

위에 말한 것도 입장 바꿔보면 다 아는 얘기 아닌가?

계란 후라이 정말 무한리필로 먹고 싶은 마음ㅇ 있고 다급해서 전화로 물어봤는데 이것저것 다 얘기해주고 돈 없어서 소주 한병 훔쳐 먹었는데 모른척 해주고 말이다.


나도 가끔 강의 갈 때 저녁이 어중간해서 김밥집에 간 적이 있다.

혼자 들어오는 것을 본 주인이 제일 구석탱이 자리에 들어가 앉으라고 손짓하더라.

별로 가기 싫었지만 다른 곳은 요리집 밖에 없어서 그집 또 간다.

아마도 장사는 돈이 많이 남아야 하고 손님은 여유를 찾으려고 하는데 장사가 안 될수록 주인은 여유가 없어진다.

어디서 이상한 장사 기술을 배워가지고 회전율 따지고 원가 따지다가 손님 다 놓치고 자기가 왜 망했는지 모른다.


“아니요. 저는 식당 안 물려줄 겁니다. 여행도 자유롭게 못 다니고 운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누가 저보러 골프 치자는데, 식당 조그마한 거 하는 놈이 골프 친다고, 짚신 신고 양복 입었다고 얼마나 흉보겠어요?”


이렇게 장사 매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게 여유없이 살면서 왜 장사하냐고?

돈 벌어서 뭐하냐고?

모르는 말씀이다.

가장 재미있는 것이 돈 버는 재미다.

그리고 그 재미잇는 곳이 장사하는 곳이다.

그러니 골프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장사를 재미로 삼는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JD 부자연구소
소장 조던
http://cafe.daum.net/jordan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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