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잘못도 아닌 늙은 할아버지의 존재.
친척들은 김장을 나눠가지고 다들 돌아갔고 나만 엄마와 남아서 뒷정리를 했다.
마당과 집 안을 오가며 잔 심부름을 하다 문득 넘어가는 해에 마음을 빼앗겼다.
종일 싱숭생숭,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그간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 어른들에 대한 원망, 온갖 감정이 뒤섞여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해는 져서 사위는 어두웠고 엄마는 아빠 끼니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10시에 나가서 해 질 때까지 병원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느라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못 먹고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안 봐도 훤했다. 아빠는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사람이고 둘째가라면 서러울 효자니까.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집 근처 대학병원으로 갔으니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할아버지 댁과 우리 집은 약 15km, 30분 거리였다.
아빠는 응급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때를 놓친 늦은 밤이라 근처에 가서 국밥이라도 먹고 얼른 집으로 가라며 동생들을 보낸 후라 하였다.
삼촌들이 아마 형님도 같이 가서 식사하자고 했겠지만 거절했을 것이다.
다행히 보호자 1인은 응급실 안에서 환자 수발을 들 수 있었으니까 자리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앉아 있긴 했지만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린 채 자책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모시고 있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빠의 한숨 소리와 엄마의 둘 곳 없는 시선 속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감정들이 서로를 노려보는 듯했다.
불편한 공기가 차가웠다.
이미 할머니 사후에 할아버지를 모시는 일 때문에 우리 가족 사이에서는 불화가 몇 번 있었다.
그때의 불화는 서로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줬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 느낀 서로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 서운함들이 남아 있을 정도니까.
아빠는 당연히 본인이 장남이니 우리 집으로 할아버지를 모셔오자 했다.
우린 떨떠름했지만 일단 그러자고 했다.
물려받은 건 고사하고 물려받을 것도 하나 없고 평생을 무능력한 부모와 어린 동생들 건사하다가 이제야 겨우 살림 펴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된 형편이었다.
삼촌들은 아빠가 어떻게 하든 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결정은 형님이 하는 거고 괜히 무슨 말을 꺼냈다가 늙은 노인을 돌아가며 모시자고 하면 큰일이니까 그 누구도 이러자 저러자 의견을 내지 않았다. 내 생각엔 그런 것 같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할아버지를 모셔와서 가장 곤란해진 사람은 엄마였다.
안방에 딸린 드레스룸에서 옷가지를 챙겨 여행 캐리어에 넣고 졸지에 작은 창고방으로 이사를 했다.
안방을 내어드리고 아빠가 출근하고 없는 시간 동안 엄마와 할아버지 둘이서 어색함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노인은 처지도 모른 채 입맛은 까다로워서 같은 반찬을 두 번 내면 손도 대지 않았다.
원래도 음식 솜씨엔 자신이 없어 아빠의 타박이 심했는데 매 번 새 밥을 해서 지어 올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시 세끼 수발에 간식까지.
평생 수발받던 사람인데 당시엔 상처한 연민까지 겹쳐서 다른 사람들이 더욱 극진하게 수발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식들은 할아버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과보호는 독이 되었던 걸까? 할아버지는 점점 생활 전반 모든 활동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했다.
평소에도 딱히 활동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긴 했지만 그 당시엔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는 있었는데 집 안에서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 번씩 아빠가 욕조에 물을 받아 할아버지를 씻겼다.
아침저녁으로는 세수에 양치까지.
할아버지 목욕이 끝나면 아빠는 녹초가 됐다.
할아버지는 팔척장신. 아빠보다 덩치가 컸다.
은퇴를 앞둔 아빠는 회사일에 노인 수발에 그리고 딱히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모든 근심 걱정들로 점점 말라갔다.
아빠가 안 계시는 끼니때가 되면 엄마의 호출.
우리는 마지못해 할아버지 식사수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안면근육이 마비되어 음식을 자주 흘렸다.
거기다가 노화가 점점 심해지면서 마비부위도 늘어나는 건지 한쪽 입술 사이에선 늘 침이 흘렀다.
식사 수발이 처음에는 할아버지를 식탁으로 모셔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단계가 많아졌다.
처음엔 수건을 무릎에 올려드리던 게 나중엔 어른용 턱받이를 둘러드렸다.
처음엔 옆에서 생선가시를 바르거나 고기를 잘라드리던 게 나중엔 아예 입에 떠 넣어 드려야 했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돌 전 아기처럼 손 하나 까닥하지 않게 됐다.
나는 워낙에 할머니 편인데다 할아버지를 미워하던 사람이라서 식사수발은 주로 동생이 들었다.
나는 가끔 아빠가 있을 때만 가식적인 친절을 베풀었다.
괜히 다정한 척 큰 소리로 안부를 묻고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할아버지라고 편한 건 아니었을 테지.
하루 종일 방에 있을 수는 없으니 깨어있는 시간 동안에는 거실을 차지했다.
할아버지가 깨어 있는 시간엔 내내 티브이가 틀어져있었다. 하루 종일 KBS1 채널 고정.
아파트긴 했지만 단지 내 산책길에라도 낮에 산책도 나가시면 좋을 텐데 바깥나들이는 일절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친척들이 와보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안부조차 없었다.
나도 동생도 더 이상 거실에서 하하호호 웃고 떠들지 않았다.
잠시 할아버지랑 티브이를 멀뚱히 보다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방으로 숨어들었다.
아빠가 없을 때는 할아버지 혼자 티브이를 보고 있었고 아빠가 있을 때는 둘이서 티브이를 봤다.
아빠라고 딱히 할아버지랑 감정적 교류가 있던 건 아니라서 거실 안엔 늘 KBS1 채널의 티브이 소리만 흘렀다.
넷이서 거실에 모여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따듯한 저녁 풍경이 사라졌다.
가족들은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오신 지 한 달 쯤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우리를 시험해보려 한 걸까?
할아버지는 급기야 안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일조차도 어려워했다.
밤 중에는 당연히 낙상 위험 때문에 침대 옆 간이 양변기에서 소변 정도만 보셨고 그건 아침마다 아빠가 비웠으니 우리는 대소변 처리를 할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출근하고 안 계시는 휴일 오전이었다.
우리를 호출하는 소리에 놀라 안방으로 달려가니 참기 힘든 대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황급히 안방 창문을 열었으나 변비 심한 노인이 몇 일만에 배출한 대변의 냄새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멋쩍게 웃는 노인을 두고 다시 거실로 모인 엄마와 나, 동생.
호들갑 떨지 않고 태연하게 치우기 위한 용기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중 누구 하나 나서서 내가 그 똥 치울게 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 날 통화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고, 느그 할배가 오늘 뒷동산에 내랑 산책 갔다가 걸어오는 길에 선 채로 똥을 싼 거라, 혹시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 볼까싶어 남사스러워가지고 내사 마 정신없이 그 산길에서 나뭇잎으로 똥 치우고 내 입고 있던 남방 허리에 둘러주고 데리고 내리 왔다 아이가, 똥 싼 바지랑 속옷은 버리삐고 운동화는 니가 사준 지 얼마 안 돼가 내가 아까바서 버리지는 몬하고 그거 빨고 있는데 내가 마 그냥 콱 죽어 삐면 싶드라. 아이고 저놈의 영감쟁이가 내를 왜 이래 애를 믹이노. 아무래도 노망이 들었는갑다. 내 인자 저 영감 똥 수발까지 들어야 하나 대소변 받아내야 할까 봐 마 겁이 나 죽겠다. 만다꼬 저 영감을 내가 살리가 이 고생을 사서하는 지 인자 내사 마 먼저 가뿌면 싶다."
그러고 바로 그 다음 날 할머니는 정말로 심장마비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얼마간 지나서야 내가 속으로 아.. 할매가 할배 대소변 받아낼 일 막막하다 하더니 그럴 일 없게 아예 먼저 가버렸구나 싶었었다.
그 생각을 하니 할아버지 미운 마음이 더욱 북받쳐 올랐다.
나는 때려 죽어도 저 할배 똥 못 치운다 하고 팩 돌아섰다.
결국 동생이 앞치마에 고무장갑에 동남아에서 스노클링 할 때 끼던 전면 얼굴형 마스크까지 끼고 나와서 뒤처리를 했다.
할아버지가 늙은 건 분명 잘못이 아니었다.
우리도 늙어갈 것이고 내 부모도 늙어서 그럴 일이 곧 생길 것이다.
그때는 내가 참 어렸다. 생각도 행동도 참 미숙했다.
퇴근 후 자초지종을 듣게 된 아빠는 대로했다.
내가 평생을 희생해서 자식새끼, 마누라 키우고 먹였더니 내 아버지한테 하는 꼴이 이따위밖에 안되냐고.
나한테 한다 생각하고 할 수 없느냐고 내가 늙으면 나한테도 이렇게 할 거냐고.
할아버지를 모셔온 이후 그간 쌓여온 우리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아빠의 서슬이 퍼렇게 독이 오른 만큼 내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눈에 불을 뿜고 대들었다.
평생을 할매 등골 빼먹고 산 저 양반이랑 아빠랑 같으냐고 아빠는 할매가 불쌍하지도 않냐고.
난 할매 생각만 하면 할배 쳐다보기도 싫다고. 아빠는 억울하지도 않냐고 할배가 아빠한테 해준 것도 없이 평생 빨대 꽂고 무위도식하는 거 지겹지도 않냐고.
"내 죽기 전까지 내가 알아서 아버지 모실 테니까 싫은 놈들은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
"그 소리 후회하지 마시오"
아빠랑 나는 강대강이었다.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은 둘이 똑같았다.
방으로 가서 보이는 대로 짐을 쌌다.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 나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네가 지금 이렇게 나가면 엄마 못 산다고.
제발 나를 봐서라도 네가 참으라고.
발걸음을 옮기는 내 다리를 붙잡고 벌벌 떠는 엄마 때문에 차마 뿌리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기어코 나는 집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