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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레카 Nov 05. 202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

객관적인, 아니 가장 주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외로운 한 노인의 죽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요양병원에서 6개월 만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던 분이라 충분히 백수를 누릴 거라고 다들 그랬다. 


60년을 함께 산 배우자 장례식에서도 눈물바람은커녕 끼니때마다 수육에 국밥에 박카스까지 챙겨 드시면서 삼일장을 치렀다. 

상주노릇을 했다기보다 유가족 대기실의 최첨단 안마의자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가끔 친척들이 나이 든 노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때, 그냥 우우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다였지, 평생을 자기 뒷바라지하느라 몸종같았던 열살 어린 아내를 그리워한다거나, 슬퍼하는 기색은 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본인 건강이 우선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밤,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거실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던 할머니에게 방에 들어와 자라고 할아버지가 발로 툭툭 건드렸단다. 


기척이 없어 한 번 더 건드렸더니 그제야 힘 없이 팔이 툭.

할아버지보다 열 살이나 어려서 당연히 더 오래 살 줄 알았던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안 계셨지만 여든 넘은 할아버지가 스스로 집안일을 하실 순 없어서 수발들 사람은 필요했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딸린 일족만도 스무 명 되는 대가족이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 일을 할 사람은 없었다. 


다들 먹고살기 바쁘기도 했고, 할아버진 가족 중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다. 

사소한 요구나 의중도 늘 할머니를 통해서 아들들이나 며느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할머니를 통하지 않고는 할아버지와 직접 대화를 해봤거나 시도해 볼 생각을 안 했다. 

나만 그랬던 걸까? 아니, 아들들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그래서 하루에 4시간, 요양보호사가 할아버지의 수발을 도맡았다.


요양보호사가 오자 모두들 안심했다. 

가장 가까이 살고 있던 며느리가 아마 제일 좋았을 것이다. 

요양보호사가 오기 전까지 정성이 들어갔든 아니든 어쨌든 아침을 차리고, 점심상을 차려놓고 출근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식단의 부실함을 가지고 입을 대던 다른 며느리들도 좋았을 것이다. 

직접 모시기에는 부담이지만 다른 며느리가 하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중적인 태도에 아마 본인들도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시아버지가 밥은 먹고 사는지 어쩌는지 관심도 없었던 며느리들도 좋았겠지 아마. 


무엇보다 본인들의 아버지를 아내들이 보살펴주길 원했던 아들들, 그러니까 나의 아빠와 삼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물어본 적 없지만, 삼촌들은 아마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장남이 알아서 모시겠지 하며 본인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닌가, 나름 걱정했었을까? 

뭐 그랬더라도 내색하지 않아서 몰랐을 수도 있고.


장남 타이틀을 가진 나의 아빠, 

우리 엄마 눈에 세상 제일가는 효자인 우리 아빠는 다른 사람에게 할아버지 수발을 들게 했다는 것에 아마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고.


당장이라도 회사를 관두고 본인이 모시고 싶었겠지?

아니, 아마 우리 아빠는 엄마가 나서서 할아버지 수발을 들길 원했을 것이다. 

아침 점심 저녁 따순밥 지어 올리고 부모 봉양 지극정성으로 열 효부 부럽지 않게.

그래서 흐뭇하고 흡족하게 여보 당신이 맏며느리로써 역할을 아주 당연히 잘하고 있군요 하면서 동생들과 제수씨들 앞에서 목에 힘주고 보란 듯이 효자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쨌든 요양보호사가 오고 나서 할아버지는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일상을 지내셨다.

아, 대체로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만 무한정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할아버지가 난 잘 지낸다 본인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할아버진 원래 말수가 적었으니까..

그래서 슬픈 건지 즐거운 건지 행복한 건지 도통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가끔 할아버지 댁에 안부차 들러보면 식사도 잘하시고 정해진 루틴에 따라 운동과 산책도 하고 또 요양보호사도 심성 고운 아주머니 셔서 정성껏 어른을 모셨다. 

엄마 아빠는 수시로 다녀가면서 과일이고 반찬이고 간식거리를 사다 냉장고를 채웠다. 

명절 때는 요양보호사에게 특별 보너스도 주고. 


그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최선이었겠지.

다들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나이였으니까. 


어쨌든 요양보호사 덕분에 표면적으로는 문제없이 아주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신 충격도 서서히 줄어들고 할아버지 수발에 대한 부담도 조금씩은 내려놓은 채 다시 예전같이 우애 깊고 화목한 일가친척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할아버지가 할머니 없이도 오래오래 잘 살아서 백 살 까지는 거뜬하게 지내실 줄 알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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