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리고 좀 그런 날
7년 전 여름, 결혼을 70여 일 앞두고 이 그림을 그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결혼식이라는 일생일대의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 쌓여 있던 과업들을 정신없이 쳐내고 있던 그때, 어떤 짬이 생겨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내가 결혼을 하다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그렸겠지 싶다. 그때의 나라면 ‘이제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되는구나...’, ‘앞으로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지!’ 이런 모범적인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까지 낭만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결혼을 앞두고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아마도 그런 감정을 가졌던 게 아닐까.
어렸을 적, 아니, 결혼 전까지는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밤 10시가 넘어가고 알코올이 이성을 잠재울 때쯤, 사랑과 연애에 대한 대화가 시작되곤 했다. 누구는 사랑이 어렵다 말하고, 누구는 사랑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사랑이 쉽다거나 사랑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아주 가끔은 가슴속에 담아오던 복잡한 감정이 노래 가사에 비춰지면서, 노래방 화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사랑은 그렇게 참 어려운 주제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것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내리자면 쉽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워오는 과정에서, 내 개인적인 사랑에 대한 개념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다. 이 그림도 그런 과정에서 그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그림의 이름을 ‘나너 나무’라고 지었다.
나너 나무
나와 너로 이루어진 ‘나너 나무’는 사랑을 양분으로 함께 자라 간다. 사랑만 있으면 그것이 땅이든 하늘이든 어느 곳에서든 자랄 수 있다. 무럭무럭 자라다 보면, 크기도 커지고, 가지도 더 나오게 되고, 꽃과 열매도 피울 수 있다. 뿌리가 더 자라나면서 그것을 받쳐주는 사랑의 크기도 더 커지게 된다. 그러나 나너 나무는 ‘나’ 또는 ‘너’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렇다. 아주 오래전에는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그만큼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지금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뭐라고 정의는 내릴 수 있지만, 여전히 사랑이 쉬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소중하지만 야속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런 순간마다 이 정의를 다시 생각하면, 나너 나무에 물을 줄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앞으로도 나너 나무를 그렇게 계속 기르면서 우리 가족의 사랑을 키워가기 위해, 나는 이 그림을 우리 집의 ‘가화(家畫)’로 삼았다. 마치 부적과도 같이 이 그림은 우리 집 한쪽 벽에 붙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며 글을 쓰다 보니, 7년이 지난 지금의 나너 나무를 다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도 처음 모습에서 시들지 않은, 더 크고 풍성하게 자란 나무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