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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좀좀 Sep 10. 2021

결정, 그 심오한 작업에 대해

문득 그리고 좀 그런 날

뇌피셜이란 말이 있다.

‘뇌’ + ‘오피셜’로 탄생한 이 단어는 전혀 공식적이지(오피셜) 않은 개인적인 생각을 마치 사실처럼 얘기하는 행태를 비꼬기 위해 생긴 신조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거짓 뉴스 기사를 쓰는 기자들, 자기 생각이 법인 것처럼 얘기하는 꼰대들, 그 밖의 카더라 뉴스를 열심히 나르는 키보드 워리어들 등, 참 여러 가지 경우에서 잘 쓰이고 있는 말 같다.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개그 콘서트가 잘 나갈 때 나왔던 유행어인 “그건 니 생각이고~!!”와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옛날 사람 인증 중)

그런데 얼마 전, 한 온라인 강의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뇌피셜이란 단어가 쓰인 것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서비스 기획자, PM으로 일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 만든 짤막한 웹툰이었는데, PM으로써(사실 모든 일의 관리자가 공통적으로 겪는) ‘의사결정’을 할 때의 고충을 그린 내용이었다. ‘데이터에 기반하여 뇌피셜로 결정’하고, ‘다수결로 뇌피셜로 결정’하고… 어차피 다 뇌피셜로 결정한다는 그런 얘기. 처음에는 웃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공감되는 내용이었고, 급기야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뭔가 결정을 하는 행위 자체가 모두 뇌피셜 아닌가?’ 물론, 그 웹툰에는 그동안 개인의 생각에만 의존해서 내려진 의사결정의 폐해를 줄여보자라는 의미로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깔려있긴 하다. 하지만, ‘데이터에 기반한 뇌피셜 결정’ 이라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참고 자료, 소스가 무엇이 되었건, 결국 결정을 내리는 데는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게 우리의 뇌를 통해 결정이 내려지는 일종의 연산 구조가 아닌가. 이런 연산 작업 없이, 데이터를 통해서만 나오는 결과는 의사결정이 아니라, 그냥 데이터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뇌피셜과 의사결정에 대해 이렇게 장황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최근에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큰 결정을 내렸던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고귀하고, 중요한 ‘결정’이라는 행위를 우리는 그동안 뇌피셜이라는 단어로 폄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우리가 꼰대라고 부르는 일터의 그 선배들은 그동안 자기가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 다양한 방법으로 축적한 지식, 상사에게 까일 것인가 아닌가를 내다보는 미래 예측까지 더해서 엄청난 연산을 통해 결정이라는 결과물을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냥 말만 하는 자들은 꼰대라고 폄하되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최근의 큰 결정은 이직이었다. 13년을 넘게 안정적으로 한 업종, 한 직장을 다니다가 다른 업종으로의 이직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처음 겪는 큰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다른 업종으로의 전환이라는 꿈. 그냥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 하지만 보통 용기로는 할 수 없고, 현실성도 점점 옅어져만 가는 그런 비전. 10여 년 가까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해오다가, 마침내 한 번 용기를 내봤더니 기회가 함께 찾아왔다. 변화를 뜻하는 Change와 기회를 뜻하는 Chance가 왜 알파벳 하나의 차이인가 늘 궁금했는데, 비로소 그 궁금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이런 게 바로 뇌피셜!!) 아무튼 기회와 함께 찾아온 변화라 할 지라도,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결정의 순간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매트릭스의 알약이 그것이다. 키아누 리브스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하는 장면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뜻하는 순간에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만큼 명장면이었고, 그의 선택은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용기. 대부분의 인간이 모르고,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파란 알약을 선택했으면 거기서 영화가 끝났겠지. 정말 중요한 결정이다.) 그에 비하면 내가 내렸던 결정은 비교적 쉬운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해서 가고 있는 길이고, 거기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중에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결정을 내린 이상, 그 결정에 대해 (나 자신이)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경험을 쌓아 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내가 가진 역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더 갈고닦아야 하는…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만, 또 무척이나 기대되기도 하는 여정이다.


결정이라는 것은   내려지면 다시 돌이킬  없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어떤 경우에는 고민만 하다가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일도 발생한다. 세상은 점점  빨리 변화하는데, 고민만 하다가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일은 앞으로 점점  많이 일어날지 모른다. 심사숙고는 하되, 최대한 빠르게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정말 엄청나게 되게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만약, 그게    결정이었다고 판단되면, 다른 결정을 빠르게 하는 편이 낫겠다. 이건 앞으로 일을  가는데도 명심해야  부분이다. 결정을 해서 후회하든,  해서 후회하든 누구도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1이라도 기우는 쪽을 빠르게 선택하는 기술이 필요한  같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뒤에는 만족할 만한,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앞만 보고 가야겠다. 키아누 리브스가 매트릭스 세상에서 총알을 막아내던 그 명장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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