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자에게 광명은 없을까. (스포주의)
아무래도 A가 수상하다. A를 범인으로 의심한다. A가 범인이 맞으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만약 A가 범인이 아니라면, 의심의 대가로 주인공이 벌을 받는다.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곡성'은 위의 대분류에 들어맞지 않는다. A가 수상하다. A를 의심한다. 결과적으로 A가 범인이 맞다. 그럼에도 벌을 받는 건 주인공이다. '의심'을 했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서 천우희가 곽도원에게 날리는 대사는, 곡성을 일차원적인 '의심-징벌' 인과관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그녀는 곽도원이 벌을 받는 이유를, 그가 쿠니무라 준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곽도원의 의심은 '합리적'이다. 시간적 연관성, 주변 지인들의 증언, 무엇보다도 그의 집에서 발견한 희생자들의 사진과 소지품들. 같은 상황에서, 게다가 만약 당신의 직업이 경찰이라면 오히려 쿠니무라 준을 의심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그는 합리적 의심의 대가로 벌을 받는다. 곽도원이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딸과 가족을 잃은 이유는 '악마'를 '악마'로 의심했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절대적 존재와 개념은 언제나 '의심 없는 신뢰'를 요구한다. 신도, 빅브라더도, 엄석대도 그의 신자나 추종자들에게 합리적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곽도원의 의심은 인간의 관점에서 충분히 합리적이지만, 초월적 영역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심의 내용이 아니라, 의심하는 행위 그 자체다. 의심하는 자에게 광명은 없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나의 글쓰기 능력을 의심하고, 등단 가능성을 의심하고, 혹여나 소설가가 되더라도 박봉에 시달리지 않을까, 미래를 의심한다. 응모한 원고가 퇴짜를 맞고, 베스트셀러 시집 작가가 생활 보조금을 받는 현실을 고려할 때 내 모든 의심은 '합리적'이다. 합리적 의심 끝에 결국 타협에 이른다. 일단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천천히 글을 쓰자.
의심하는 자에게 정말 광명은 없을까. '곡성'은 무서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