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403호의 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바다에 누워 Apr 22. 2022

짱구 엄마, 삼순이는 30대를 어떻게 보냈을까

편지 일기 04.



만화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 엄마 봉미선은 짱구와 짱아, 이렇게 1남1녀를 낳은 스물아홉 예쁜 나이의 엄마였고,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는 연애와 결혼이 무척이나 하고 싶었던 겨우 서른 살의 파티쉐였어. 그리고 나는 서른 셋까지도 꿈을 좇고, 후회만 거듭 반복하는 멍청했던 여자사람이었고. 나는 삼순이보다, 짱구 엄마보다도 몇 해는 더 살았는데 왜 여태껏 후회와 깨달음만 반복하는 삶을 살았던 걸까? 다들 그렇게 살았을까? 이렇게 살았던 게 맞는 걸까?

그래도 나는 내가 꽤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왔어. 이를테면 라디오 사연에 몇 차례 당첨이 되어서 상품도 적잖게 받아봤고, 이벤트로 진행하는 제비뽑기에서 여러 번 뽑혔던 적도 있었고. 물론 그 행운은 이십 대 초반에서 처참하게 끝이 났지만 말야. 그 후엔 내 인생의 디폴트 값은 항상 ‘꽝’이라고 입력되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이십 대 초반에 평생의 운을 다 써버린 거겠지. 그래도 다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면 내가 경험한 것들 모두가 실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한참 전에 본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드라마 <시그널>의 무전기로 “과거의 나에게 무전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요?”가 그 회차의 메인 질문이었어. 출연한 유퀴저들은 대부분 서툴었던 어린 ‘나’에게 지혜를 전달하는 말들을 해주더라고. 웃기지만 그 방송을 보고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어. 나는, 열여덟 살이었던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

“같은 반 (친하지 않은) 친구 J가 동아리에서 김장 봉사활동을 갔었다고 말하면서 네게 그랬잖아. ‘존나 하기 싫어서 대충 했어. 땅에 떨어진 배추 주워다가 속 버무리고, 넣다가 땅에 떨어진 거 그냥 주워다가 바로 봉투에 넣었어. 그거 받는 사람 졸라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흙맛 나고 맛있겠지?’라고. 바로 그날 집에 갔더니 우리 집 앞에 친구가 소속된 동아리 이름으로 보내온 김치 한 박스가 놓여 있었던 그때.(그 박스에 붙은 메모에는 ‘불우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습니다. 사랑을 듬뿍 담아 보냅니다. 힘내세요!’라고 쓰여있었지.) 가만히 문 앞에서 그 박스를 멍하니 보며 많이 힘들어했잖아. 그런데 그렇게 힘들어하고, 기죽을 필요 없었어. 그 김치를 맛있게 먹었던 동생을 보며 화를 내고 소리 칠 것도 아니었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 그 일로 인해 네가 슬픔에 휘감겨 살 필요도 없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조금 더 살아보니까 우리 인생 그렇게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열여덟 살엔 그 나이에 맞게 밝게 살아가자. 행복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밝게, 그리고 웃으면서 살자. 다 괜찮아질 거니까.”

뻔뻔할 정도로 밝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나를 더 많이 사랑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뭐,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다음 생에는 밝고, 씩씩하고, 뻔뻔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태어나보자. 이번 생은 처음이라 서툰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고생했어.






2020 글쓰기 프로젝트 ‘블라인드 라이팅 <당신이라는 우주> 실은 창작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생활 10년 차에 새삼 깨닫게 된 나의 사회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