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과 자극성, 그 불가분의 관계
영화 <더 킹(2017)>에는 주목할 만한 장면이 나온다. 열정 넘치는 초임 검사인 박태수(조인성 배우)가 맡게 된 사건을 조용히 묻어버리기 위해서 양동철 검사(배성우 배우)는 박태수를 검찰청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 한 영상을 보여준다.
영상의 재생에 앞서 던져지는 대사 “불리한 일 생기거나 여론 전환용으로 딱이거든” 그 순간 카메라는 텔레비전 속에 나타난 글자를 비춘다. ‘탤런트 차미련 비디오’
필자는 이 글에서 검찰과 정권이 여론 전환의 도구로 연예인의 범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시시콜콜한 의혹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 <더 킹> 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가 연예 보도를 다루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언제부터 연예 보도가 그저 ‘여론 조작의 도구’ 혹은 ‘저널리즘이 아닌 가십거리에 불과한 것’과 같은 부정적인 표지를 얻게 되었는지, 과연 그것이 합리적인 주장인지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고자 한다.
“묵히고 터뜨리는 거, 검사라는 건 그걸 알아야 성공하는 거야”
언제부터 연예 보도는 저널리즘의 한 축이 아니라, 대검찰청 지하실 아카이브에 쌓여서 묻혀야 할 이슈를기다리며 숙성될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을까.
스포츠와 연예는 저널리즘이 아니고 단지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가정은 한 가지 숨은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는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엔터테인먼트와 저널리즘의 구별 근거가 질적인 측면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가 단순히 ‘오락’이라는 뜻을 가진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전자인 저널리즘이 오락의 수준보다 더 높은 질을 가졌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 기본 전제가 부당함을 비판하기 위해 먼저 해당 숨은 전제의 타당성을 판단해 보고자 한다.
대전대 글로벌콘텐츠 학과의 양선희 교수님의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를 빌려오자면 다음과 같다.
“복잡한 사회 현실을 게이트 키핑을 통해 재구성한 것으로 취재와 기사 작성 및 편집의 결과물인 뉴스를 미디어를 통해 보도, 해설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며, 사실성과 객관성, 공정성 등이 기본 원칙으로 간주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흔히 ‘연예 보도’를 떠올릴 때,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여러 자극적인 보도는 당연히 저널리즘으로 간주하기 어려워 보인다.
공정성은 고사하고 객관성과 사실성에서도 의문을 잔뜩 남겨주기 때문이다.
다만 사전 Britannica의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어딘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The colection, preparation, and distribution of news and related commentary and feature materials through such print and electronic media”
“인쇄 및 전자 매체를 통한 뉴스 및 관련 해설 및 특집 자료의 수집, 준비 및 배포”
앞선 정의와는 달리, 원칙의 제시 없이 그저 수단만을 나열한 이 정의에 따르면 디스패치의 자극적 보도도 충분히 저널리즘으로 포함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과연 어디에서 이런 괴리가 발생한 것일까.
필자는 이 괴리가 스포츠 보도와 연예 보도를 우리가 저널리즘으로 간주하는 것들과 질을 나눠, 명확한 상하 관계를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본성에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널리즘으로 대표되는 기사에 객관성으로 수렴하는가치를 부착하는 것에 반해, 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스포츠, 연예 보도와 같은 기사에는 자극성으로 수렴하는 가치를 부착한다.
이러한 분리 과정을 통해, 자극성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인 저급한 뉴스와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고급한 뉴스는 타당하게 나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자극성이 단지 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것만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일까.
언론학자 미첼 스티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널리스트는 셰에라자드 신드롬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일 야화의 셰에라자드가 처한 상황처럼 저널리스트 앞에는 재미있는(자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왕(독자)이 있으며, 때문에 모든 저널리즘은 생존을 위해 재미있는(자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이다..
즉, 모든 저널리즘은 독자의 클릭을 유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피하고자 자극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살인 사건의 보도에서 ‘명문대 학생’이라는 표제의 반복이 과연 공정, 객관, 사실성을 위해 반복해서 강조해야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소일까,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쁜 소식에서 '이혼'은 배제할 수 없는 요소인가?
저널리즘으로 대표되는 것과 엔터테인먼트로 대표되는 것 양자 사이에는 자극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만 있을 뿐 사실은 모두 자극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뉴스가 점차 저급해진다는 선형적인 사고방식의 영향도 양자의 질 판단에 있어 그 영향이 이에 못지않다.
흔히 '정보의 바다’로 대표되는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손꼽힌다. 미디어를 더욱 비판적으로 분별하여 듣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백 번 동의해 마지않는다..
다만, 미디어 리터러시의 필요성은 늘 ‘요즘 은’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과 함께 배열되고 강조되는데, 이는 ‘요즘’ 미디어 환경의 문제점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이에 대비되는 ‘과거’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과장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과거의 저널리즘은 공정함만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자극성으로 가득 찬 쓰레기장 속과 같으니 잘 찾아서 읽을 필요가 있다”와 같은 비약 말이다.
1898년 메인 호의 침몰이 미국과 스페인 사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주된 원인으로 윌리엄 허스트와 조제프 퓰리처의 경쟁적인 선동이 손꼽힌다는 사실, 그리고 훨씬 더 이전인 기원전 44년 아우구스투스의 가짜 뉴스 선동을 떠올리면 이러한 과거의 황금기에 대한 동경은 의심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결국 이런 선형적 사고방식은 다양한 방식의 성격으로 구분될 수 있는 저널리즘을 단지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두고, 이러한 우리의 이분법적 구별 행위를 보다 간편하고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최초의 저널리즘이라고 추정되는 로마 시대의 <Acta Diurna>는 그 콘텐츠로 법률의 공표뿐만 아니라 로마의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의 죽음, 결혼 등 가십 칼럼도 포함했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저널리즘은 객관적 정보 제공과 함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 양자를 본질로 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제 와서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들을 저널리즘에서 제외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는 오히려 본질을 거스르는 행태가 아닐까.
저널리즘이 주된 목표를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저널리즘과 다소 자극성만을 추구하는 저널리즘 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할 터이지만, 엔터테인먼트를 아예 저널리즘의 여집합으로 간주하고 배제하려는 작금의 움직임은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늘도 훌륭한 연예 저널리즘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