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아빠. 고추장과 김치를 넣고 싹싹 비벼먹다
자려다가 배가 고파 오랜만에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싹싹 비벼먹었다. 친구가 갖다 준 총각김치가 잘 익어 무척 맛있었다.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벼먹어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일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통 안 그랬던 것 같다.
아빠는 뭐든지 비벼먹는 것을 좋아했다. 별다른 걸 넣고 비비는 것도 아닌데 아빠가 비벼놓은 밥은 더 맛있었다. 아빠가 좀 괜찮았던 시절엔, 아빠가 비벼놓은 밥그릇에 숟가락을 같이 꽂아서 둘이서 맛있게 나눠먹곤 했다. 마치 만화 속 요츠바와 그 아빠처럼. 엄마는 그래서 아빠는 고추장 없으면 못 살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지금 나는 밥을 맛있게 비벼먹다가 잠깐 울컥 한다. 고추장의 매운 맛이 혀에 달착지근하면서도 싸하다. 기억이란 이렇게 작은 계기 하나로 확 덮쳐 오는 것이고, 그게 일상적이면 일상적일수록 여운은 더욱 강하다.
죽고 나서야 혹은 내곁을 떠나서야, 그제야 그립게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계속 옆에 있으면 아마 이렇게 조금은 애틋하게 생각하기가 불가능했을. 그것은 나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가능했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의 엄마가 아니고 딸이었고, 아직은 딸이고 싶었다. 좀더 그가 나이가 들었고 내가 나이가 들었다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떠올리는 건 마음이 먹먹해지는 일이다.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단단한 '죽음'이라는 현실. 다신 이야기 할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진리, 죽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는 책꽂이를 급히 뒤져 너무 많이 봐 모서리가 나달나달해진 책을 한권 꺼낸다. <세계묘지문화기행>. 갑작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이 연이어 자의로 혹은 타의로 영영 내곁을 떠났을 때 그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나는 이런저런 미친 짓, 이상한 짓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마음의 독을 내뱉기 위해 외부에 독을 만들었다.
밤새 길을 하염없이 걸었던 적도 있었고, 술에 쩔었던 적도 있었고, 며칠이고 먹지도 씻지도 않고 방밖으론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쉬지 않고 책을 읽은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가에서 이 책 <세계묘지문화기행>을 발견했다. 저자가 유럽, 아메리카 , 아시아, 세계의 다양한 묘지들을 직접 답사하고 수백장의 사진들과 함께 실어놓은 책이었다.
어쩌면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취재한 다양한 묘지들 중에서 나는 일본의 묘지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일본의 묘지는 다른 나라들처럼 묘지나 납골당처럼 먼 곳에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 유배하는 것처럼 만들지 않았다. 마을 한가운데, 야구장 옆에, '공원묘지'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게 그렇게 삶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함께 하고 있다. 기억된다.
아, 그래. 어차피, 나도 죽는다. 좀 뒤일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살아라.
그러니 거기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죽고나면 알게 되겠지. 혹 만나게 되면 확실친 않지만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서 죽을 테니 다 아는 처지에, 같이 나이먹은 처지에 점잖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아마 그땐 이 지상에서의 일 같은 건 서로 말하지 않겠지. 눈빛으로 알게 될테니.
혹은 내가 지금 홀로 마음속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이미 저 하늘에서 다 듣고 있을 것이고, 그도 내게 미안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을 테니.
나도 사랑했었다. 그리고 계속 사랑하고 싶었다. 그가 더이상 망가지지 않았으면 했다. 비록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은 편안할 테니 다행. 그리고 이제 다시 사랑하려 한다. 옆에 없는 그를. 옆에 없어서 오히려.
그래서 나는 가끔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면, 계기가 생기면 이렇게 오래된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먼지 속에도 아주 깊은 곳에는 잠깐잠깐 반짝이던 순간들이 분명히 몇개 있었다. 항상 시궁창이었던 건 아니다.
책을 내려놓고 나는 다시 밥을 한 숟갈 한 숟갈씩 뜬다. 맵싸한 밥알이 넘어가고, 질겅질겅 김치가 씹힌다. 쨍강쨍강 좁은 그릇에서 둘의 숟가락이 부딪치던 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울다가 웃는다. 그리고 절대 입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을 숨쉬기를 배우듯 힘들게 토해본다.
"아, 보... 보... 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