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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Dec 13. 2022

우유컵 고양이

열매는 우유 먹는 게 싫었습니다. 흰 우유는 달지도 않고 맛이 없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몸에 좋다며 매일매일 우유 한 컵씩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열매는 엄마가 따라주고 간 우유 한 컵을 노려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어요. 맘 같아선 싱크대에 따라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차마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너 우유 대신 마셔줄까?"


열매는 깜짝 놀라 여기저기를 둘러봤어요.


"여기야, 여기. 우유컵."


열매가 컵을 보니, 컵 바깥에 그려져 있는 얼룩 무늬 고양이 그림의 입이 움직이고 눈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어요.


"내가 대신 우유를 마셔줄테니 넌 뭘 줄래?“


“내가 우유를 너한테 주는 건데 또 뭘 줘야 돼?”


“거참, 똘똘한 아이네. 어쨌든 그래도 네가 싫은 걸 없애주는 거니까 나는 뭐든 받고 싶단 말이야.”


열매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말하는 컵 고양이가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어요.


“그럼 내가 먹어야 하는 우유를 너한테 매일 줄게. 그리고 간식으로 받는 것 중 뭐든 너한테 한 입 줄게. 그럼 됐니?”


“뭐, 좀 아쉬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그럼 앞으로 너는 나한테 매일 먹을 거 줘야 한다. 약속해. 그래야 내가 먹을 수 있거든.”


“알았어. 약속!”


열매와 우유컵 고양이는 이렇게 둘 만의 약속을 했습니다. 열매는 매일매일 우유컵 고양이한테 우유와 간식을 줬어요. 우유컵 고양이가 먹을 걸 먹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우유컵 안에 우유를 따라줍니다. 그러면 스르르르 우유가 사라져요. 그리고 컵 바깥의 우유컵 고양이가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간식으로 나온 과자나 빵 한 조각을 먹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컵 안에 넣어두면 어느샌가 스르르르 사라져 버리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매일 맛있는 걸 먹다보니 우유컵 고양이는 점점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눈에 잘 띄지 않았는데 점점 살이 찌다보니 이제 우유컵의 빈 곳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열매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유컵 고양이야, 너 이렇게 계속 살이 쪄도 괜찮아? 컵 바깥이 이제 네 몸으로 꽉 찰 거 같아.”


“냐옹, 나도 사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이대로라면 나는 더 이상 커질 데가 없어서 큰일이거든.”


“무슨 방법이 없니?”


“하나 있긴 해. 근데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열매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귀가 쫑긋 했어요. 매일매일 우유를 주면서 우유컵 고양이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열매는 우유컵 고양이가 많이 좋아졌거든요.


“내가 옮겨갈 큰 컵을 네가 구해오는 거야. 그 컵은 하얗고 아무 그림도 없어야 해. 내가 들어가 그림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할 수 있겠니?”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난 네가 좋으니까 한번 노력해 볼게. 그럼 큰 컵만 있으면 되는 거야?”


우유컵 고양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말했어요.


“아니야. 그 컵을 구해온 다음 네가 지금 내가 들어있는 우유컵을 깨뜨려야 해. 그래야 내가 나갈 수 있거든.”


열매는 그 말을 듣자 이건 좀 힘들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컵이나 그릇을 깨면 엄마한테 크게 혼나곤 했거든요. 그래도 우유컵 고양이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큰일이네요.


“알았어. 일단 내가 크고 하얀 컵을 먼저 찾아볼게. 그다음에 또 생각해보자.”


“고마워, 열매야. 냐옹.”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열매는 크고 하얀 컵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할 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부엌에 있는 컵들을 모두 살펴봤지만 우유컵보다 큰 컵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하얗고 아무 그림이 없는 컵은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집밖으로 나왔어요.


크고 하얀 컵, 크고 하얀 컵 어디서 구하지? 혼자 중얼대며 길을 걷고 있는 열매앞에 갑자기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위에서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냐옹, 그 컵 내가 구해줄게. 그럼 나한테 뭘 줄 수 있니?”


열매는 이번에도 깜짝 놀랐어요.


“야옹아, 네가 말한 거니?”


“맞아, 내가 말한 거야. 우유컵 고양이의 이야기를 듣고 널 찾아왔지. 고양이 세계는 소문이 빠르거든.”


“뭘 줘야 되니? 나는 우유랑 간식밖에 갖고 있는 게 없는데. 야옹이 네가 지우개나 연필 같은 걸 갖고 싶어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우유랑 간식. 나는 너네집의 새 우유컵 고양이가 되고 싶어. 이제 바깥에서 음식 찾아 헤매다니는 게 힘들고 지겹거든. 우유컵 안에 들어가서 매일 맛있는 우유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싶어. 다만 나는 그 얼룩 고양이처럼 매일매일 우유를 다 마셔줄 수는 없어. 살이 금방 쪄서 우유컵을 빨리 나가고 싶진 않거든. 조금씩만 마실 거야.”


“정말? 그러면 크고 하얀 컵을 나한테 가져다 줄 수 있어?”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어요.


“가져다 줄 수 있고 말고. 내가 크고 하얀 컵이 있는 집을 미리 알아뒀다고. 대신 내가 들어갈 작고 그림이 없고 하얀 새 우유컵은 네가 구해놓아야 해.”


열매는 안심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전에 부엌에서 딱 알맞은 크기의 우유컵을 본 적이 있거든요. 얼룩 고양이가 들어가기엔 작지만 날씬하고 작은 이 검은 고양이가 들어가기엔 딱 좋았어요.


“그럼 내일 낮에 내가 컵을 가지고 너네집에 찾아갈테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열어줘.”


“알았어!”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열매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은 고양이가 새 우유컵 고양이가 되면 얼룩 고양이는 어떻게 하죠? 한 집에 두 마리의 우유컵 고양이가 있으면 안 되는 걸까요? 검은 고양이는 우유를 조금만 먹는다고 했으니 얼룩 고양이에게도 조금씩 나눠주면서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요?


열매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집에 와서 우유컵 고양이에게 검은 고양이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해주니 아니나 다를까 우유컵 고양이는 눈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이 집에 우유컵 고양이는 나 하나만 있으면 돼! 그리고 나는 내가 먹을 걸 다른 고양이랑 나눠 먹기는 싫단 말이야. 너는 컵 하나도 못 구해서 일을 이렇게 만드니? 냐옹냐옹!”


“하지만 우유컵 고양이야, 내가 어디 가서 네가 들어갈 만한 크고 하얗고 그림이 없는 컵을 구하겠니? 이대로 있으면 너 큰일난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너도 조금씩 먹으면서 컵에 좀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되면 좋잖아.”


우유컵 고양이는 기분이 나쁜 듯 눈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유컵 고양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마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면 검은 고양이보다 나한테 더 우유를 많이 따라줘야 해. 알겠지?”


열매는 이 말을 듣자 웃음이 나왔습니다.


“알았어. 약속할게.”


“그래, 그럼 네 말대로 할게.”


자, 이제 우유컵 고양이와 말씨름은 이제 해결이 되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어요. 우유컵 고양이가 들어있는 우유컵을 열매가 깨뜨려야 한다는 거죠.


아무리 우유컵 고양이를 위한 일이라지만 일부로 컵을 깬다는 게 열매는 굉장히 꺼려졌습니다. 엄마는 열매나 실수로 무언가를 깨도 위험하다며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하고 엄하게 조심하라고 야단을 쳤거든요.


드디어 다음날 낮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열매는 우유컵 고양이와 함께 검은 고양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검은 고양이와 옆에는 크고 하얗고 그림이 없는 컵이 놓여 있었어요. 열매는 얼른 컵을 들고 검은 고양이가 들어오자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우유컵 고양이 옆에 그 컵을 놓았어요. 그리고 작고 하얗고 그림이 없는 컵도 꺼내 놓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내가 과연 컵을 깰 수 있을까요?


그때였습니다.


“열매야 너 저기 부엌 밖으로 나가 봐.”


갑자기 검은 고양이가 훌쩍 컵들이 놓여 있는 식탁 위로 올라가더니 말했습니다. 열매는 왜 그러지? 하며 검은 고양이의 말대로 부엌을 나가 거실로 갔습니다. 열매가 부엌을 나가자 검은 고양이는 발을 슬쩍 밀어 얼룩 무늬 우유컵 고양이가 들어있는 컵을 밑으로 떨어뜨렸어요.


컵이 바닥에 닿아 깨지자 냐옹! 하는 소리와 함께 얼룩 무늬가 휙- 하며 보이더니 다시 크고 하얗고 그림이 없는 컵 바깥에 얼룩 무늬 고양이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이제 하얗고 무늬 없는 컵의 조각들이 뒹굴고 있고요.


“네가 다칠까봐 내가 대신 깨뜨려줬어. 고마운 줄 알라고. 냐옹.”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팔짝 뛰더니 작고 하얗고 그림이 없는 우유컵 안으로 들어갔어요. 이제 열매네 집에는 고양이 그림이 있는 우유컵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그날 회사에서 돌아온 엄마는 부엌 바닥에 깨져 있는 컵 조각들을 보고 열매를 혼을 냈습니다. 하지만 열매는 혼나면서도 식탁 위에 무사히 있는 우유컵 고양이들을 보면서 속으로 뿌듯해했답니다. 얼룩 무늬 우유컵 고양이, 검은 우유컵 고양이 모두 다 열매는 참 좋아하니까요. 그래도 이제 컵을 깨는 일은 하지 않게 우유를 조금씩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려면 열매도 우유를 조금씩은 마셔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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