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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곶에 가면
by josee Feb 11. 2018

내가 카페를 한다고

장사의 시작

내가 제주로 이사한게 2013년 4월 초.

그는 2012년 11월 1일.


연애를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그가 제주로 내려가 버렸다. 그가 먼저 내려가 자리를 잡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현실적인 고민들로 6개월 뒤에나 내려왔다.

내가 제주에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는 바로 실행에 옮긴 이 남자. 생각지도 못한 빠른 결정, 그의 추진력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컸다. 제주를 너무 좋아하지만 아직 나는 제주에 내려가 살 만큼의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에 내려가 살 만큼의 경제적인 준비를 다 하지 못했고, 고되고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었지만 사랑하는 나의 일을 내려놓기가 어려웠다. 그때 당시 패션 브랜드의 마케팅(광고/홍보) 담당자로서 내 커리어는 어디에 명함을 내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캐주얼에서부터 아동복, 여성복, 남성복, 스포츠웨어, 잡화브랜드까지 내 손을 거쳐간 브랜드만도 수십개였으니까. 2001년부터 그 일을 했으니 제주에 내려오기 전까지 12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이 모든 커리어를 한순간에 놓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내가 제주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제주도는 관광지인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서비스 관광업이 아니던가. 나는 서비스업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여행 다니는데에만 익숙한 여행자일 뿐. 마케터로서 오랜 시간 지내왔던 터라 늘 예상하고 예측하고 기획하는, 명확한 일에 익숙했다. 자로 잰 듯한 일을 했기에 사람을 대할때도 어쩔수 없이 사무적이고 계산적으로 대해왔고 그렇게 오랜시간 지내면서 그런 말투와 행동이 원래 내것인냥 몸에 베어버렸다. 그렇기에 서비스업은 내가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일이라는 생각을 짐작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나는 제주에서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자영업? 그렇다면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월별 고정적인 수입은? 자영업이란 자고로 하루하루 불안정한 수입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득하며 자라온 내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우리 아빠는 충남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금은방을 하셨다. 직접 세공을 하셨던 우리 아빠는 직접 금,은반지와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 모든 주얼리를 디자인하다보니 단골이 많이 생겼고 생각보다 금방 자리를 잡았는데 그 동네에 금은방을 차리면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빠의 가게가 막 자리를 잡던 그 즈음, 그 작은 시골 마을에 금은방만 다섯군데가 넘게 생겼다. 그것도 종로에서 예쁘고 화려한 물건을 떼다 파는 주얼리 샵 말이다.

그 이후로 아빠 가게에는 손님이 확 줄었다. 손님이 한명도 오지않는 날이 잦아지고 아빠의 한숨도 늘었다. 주말이면 성당에 가는 아빠를 대신하여 가게를 보았는데 나는 방안에 버려진 짐짝처럼 앉아있다가 아빠가 돌아오면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일상이었다. 생활고라는 단어의 말뜻을 그 어린 시절에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것 같다.

나는 그때의 아빠 모습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손님 없는 가게에서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빠의 그 쓸쓸하고 허망한 눈빛. 고정수입이 없으면 얼마나 고단하게 살게 되는지, 가장으로서 아빠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 속사정을 다 알지는 못해도 어느정도 가늠은 할 수 있었다. 손님없는 가게에 홀로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는 아빠의 슬픈 눈빛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너무 마음이 아팠으니까. 장사는 뜻대로 안되고 딸들에게 사주고 싶은 것을 맘껏 사주지 못하는 아빠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딸 넷을 키우며 크고 작게 들어가는 학비며 생활비는 아빠의 숨을 조이는 현실이었을테다.

”장사하는 사람은 만나면 안돼“ 우리가 자라는 동안 아빠는 늘 단호하게 말했었다. 적은 금액이더라도 안정된 직장에 다니는 남자, 회사원을 만나라고. 그러다보니 나는 결국 자영업의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수가 없었고 회사를 쉽사리 그만두지 못했다. 더구나 15년 가까이 카페 운영(자영업)만 해온 이 남자를 부모님이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실지가 더 걱정이었다.


그러다보니 회사를 그만두는 일부터 제주로 이사하는 모든 일에 그와 언쟁을 해야만 했다. 끝도 없는 다툼이 유선상으로 계속 되었다. 전화로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 불안정한 수입 걱정을 하며 제주에 내려오길 망설이던 내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그에게 당신이 하려는 카페 일을 함께 해보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는 <카페>에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직장인들의 꿈처럼 늘 하는 얘기있지않나. "아 회사 때려치고 카페나 하면 좋겠다" 카페나...

그랬으니 겁도 없이 나는 카페를 함께 해보고 싶다고 했겠지. "카페나" 하자. 그때는 카페가 힘들것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내 상상속의 카페는, 그저 여유로운 그와 나의 일상,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내려마시는 그림만 보였으니까. 솔직히 이런 전쟁같은 삶을 상상도 못했다.


그와 함께 카페를 하기로 결정하고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하는 가게 자리가 있으면 주인을 찾기가 어려웠고 주인을 찾으면 빌려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주인을 찾기 위해 건축물 대장을 떼어 현주소지에 편지를 썼다. 답신이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오랜시간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면 주소지로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는 제주에 빈 집도, 빈 상가도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빌릴수 있었다. 금능의 카페 자리도 우리가 금능에서 염두해둔 여러 후보 중에 하나였는데 사실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워둔 창고였던터라 가게 구실을 못할 것 같았고 이렇다 할 개성이 없는 외관이 영 내키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주로 내가 반대를 하고 그가 주로 나를 설득시킨다. 결국 우리가 가장 바라던 가게 자리는 우리의 타이밍과 맞지 않아 다른사람에게 소개해주었고 그가 이정도면 괜찮아. 라고 했던, 내 마음에는 들지 않는 건물의 1층을 임대하게 되었다.


건물주는 5년짜리 계약서에 싸인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제주까지 와서 먹고 살겠다고 하는게 기특하다며 장사하고 싶은 만큼 오래동안 장사하라고 했다. 그랬었다. 그때는

magazine 그 곶에 가면
제주에 살며 조용한 카페를 운영합니다.
주로 어둡고 무거운 제주의 삶을 일기처럼 써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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